[이승재 칼럼-하이브리드角] 코로나19 세상 길…희망의 역설
2020-06-26 14:32
코로나19의 길…읽고 듣고 걷기(feat. 스톡데일)
▶지구적 재앙, 코로나19 세상과 시대, 공동번역 성서(bible.cbck.or.kr/Ncb) <요한의 묵시록>을 펼쳐본다. 이 묵시록은 성경의 가장 마지막 편이다. 세상 마지막과 예수의 재림을 예언하는 강렬한 환영(幻影)의 문장이 가득하다. 종말과 심판의 공포와 새 세상의 환희가 교차한다. 죽음과 종말은 기독교뿐 아니라 대부분 종교의 기원·계시와 구원, 내세의 모태(母胎)다.
그런데 사이비 종말론 교주들은 묵시록 구절을 제멋대로 가져다 마음 약한 이들을 현혹한다. 끝 부분에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덧붙이거나 떼어버리지 말라”고 엄히 못 박았는데도 말이다.
성서학자인 허규 신부는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를 통해 요한 묵시록이 위로와 격려와 희망을 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래 언제 종말이 오고 누가 심판을 받는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해도 희망을 잃지 말고 신앙을 지켜 가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묵시록은 소설 <로드>(THE ROAD·코맥 매카시) 때문에 다시 봤다. <로드>는 왜,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대재앙 이후 종말 상황의 지구가 배경이다. 태양 빛은 힘을 잃고 달은 더 어두워졌다. 강물은 시커멓고 허공에는 재만 날린다. 인간 사냥, 식인(食人)의 시대다. 남자는 위험을 피해 어린 아들과 남쪽으로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그는 길 위에서 신(神)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묻는다.
열렬하게 신을 말하던 사람들이 이 길에는 이제 없다. 그들은 사라졌고 나는 남았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세계도 가져갔다. 질문: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로드>에서 남자는 아들에게 ‘희망’을 고문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담담히 말한다.
우리가 사는 게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눈을 뜰 때마다 부자(父子)는 살아 있는 걸 확인한다.
코로나19 재앙의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이 길을 걷는 우리 역시 살아있다. 아직 여기 있다.
▶투쟁, 분투의 소설가 매카시가 쓴 ‘길’은 해방, 혁명을 노래한 시인 김남주와 요절한 천재 음악인 유재하로 이어졌다. 우리가 걷고 있는,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모르는 코로나19 세상의 길.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읊조린다.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김남주의 시에 곡을 붙인 ‘길’은 투쟁적인 민중가요지만 돈돈히 부르면 이런 발라드곡도 없다.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나는 안다 이 길의 역사를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여기서 내 할일을 하라
시인은 이 길을 함께 가자고 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세상 종말의 길에 빠져 있다가 음악과 시로 조금은 힘을 내보니, 베트남 미군 포로수용소 이야기가 떠올랐다. 희망의 동아줄만 잡고 있었던 사람들과, 그저 현실을 버텨 살아낸 이들의 생사가 엇갈린 얘기.
‘이제 곧 나갈 거야’라는 희망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던 포로들은 몇 차례 계속 절망을 거듭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약해 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포로는 고향에 자주 가던 동네 골프장을-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까지-떠올리며 매일 매일 가족·친구들과 함께 상상 골프를 즐겼다. 막연한 희망을 가졌던 포로들에 비해 그저 하루 하루 상상 골프를 쳤던 이 포로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스토리를 검색해보니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용어를 배우게 됐다. 베트남전쟁 때인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포로생활을 했던 미 해군장교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의 이름에서 유래된 단어다.
당시 대부분의 동료들이 수용소에서 사망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스톡데일은 포로들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경계했다. 수용소에서 가장 일찍 죽은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였다고 한다. 이들은 크리스마스에는 석방되리라 믿고 희망에 차 있다가 이 희망이 좌절되면 실망하고, 다음에는 추수감사절의 석방을 기대했다. 또 좌절, 실망. 그렇게 막연한 희망을 품고 기다리다 끝내 석방되지 않자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희망의 역설'로 번역된다.
비슷한 희망의 역설은 등산에도 있다. 등산 고수들이 절대 안 하는 말이 있다. “다 와 가, 조금만 더 가면 돼.”, “이제 다 왔어, 금방 정상이야.” 초행길 동반자, 등산 초보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말이 결국 탈진, 부상 등 사고로 이어질 때가 적잖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치료제가 연내에 개발될 거란 기대, 조만간 백신이 나올 거라는 예상 등 머지않아 코로나19가 끝날 거란 희망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저 한 발 한 발 묵묵히 코로나19 세상의 길을 걷자.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길이지만 내 할 일을 하며 함께 가면 된다. 여기 살아 있다는 걸 서로 함께 확인하면서. <로드>의 아버지는 끝내 멈췄지만, 아들은 지금도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으리라. 가슴에 불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