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준의 취준생 P씨](6) '자소서포비아'에 빠진 취준생, '자소설'이 정답일까

2020-06-03 08:50
취준생 10명 중 8명, '자소서포비아' 겪어
'자소서' 학원부터 대놓고 대행 업체까지 등장
"주변 지원제도 이용해서 미리 준비 가능해"

[편집자주] 올해 4월 기준 국내 취업준비생(취준생)은 약 117만명입니다. 누구나 이 신분을 피하진 못합니다. 준비 기간이 얼마나 길고 짧은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취준생이라 해서 다 같은 꿈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각자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만 합격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만은 같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취준생들에게 쉼터를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매주 취준생들을 만나 마음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응원을 건네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취준생은 합격(pass)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P씨로 칭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P씨(27)는 품질관리직을 희망하는 취준생이다. 품질관리직은 제품의 원료, 상품 포장, 적재까지 생산 현장의 모든 부분을 관리한다. 생산부터 유통까지 철저한 품질 점검을 통해 소비자의 니즈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업무 목표다.

지난달 26일 만난 P씨는 '산업공학'이라는 대학 전공을 살리기 위해 품질관리직을 준비한다고 밝혔다. 졸업 준비 중 틈틈이 ERP 정보관리사, 유통관리사 등 관련 자격증도 준비했다. 하지만 P씨는 본인 이력서에서 자격증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취업 실패의 원인으로 ‘자기소개서’(자소서)를 꼽았다. 입사 1차 관문인 서류전형 통과 확률이 10%가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씨는 “(이력서에) 빈칸 채우기를 위한 자격증보다 자기소개서에 담을 수 있는 실용적인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자소서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자소서포비아’에 빠진 것이다.

◆취준생 10명 중 8명, '자소서포비아' 겪어

P씨는 “재수로 입학해서 교환학생까지 다녀오니 같은 4학년이라도 연장자에 속했다”며 “준비할 게 많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칼같이 졸업하고 취업한 사람들을 보면서 조바심이 났다”고 말했다.

취업 문을 여는 건 쉽지 않았다. P씨가 1년 간 쓴 이력서는 총 34개. 이 중 서류전형을 통과한 곳은 세 군데에 불과했다. P씨는 “자격증을 따는 와중에 자기소개서도 써봤어야 했는데 여유가 없었다”며 “막상 지금 쓰려고 하니 자기소개서에 들어갈 내용이 많이 없는 것 같다”며 자신을 평가했다.

P씨처럼 ‘자소서포비아’를 겪고 있는 구직자가 10명 중 8명이다. 취업 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올해 4월 취업준비생 215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88.1%가 ‘자기소개서 및 이력서를 작성할 때 막막하거나 한계를 느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로는 복수 응답으로 ‘무엇을 적어야 할지 막막하다’(59.9%), ‘어떤 부분을 강조해야 할지 어렵다’(47.8%) 등이었다. P씨 역시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형식을 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가장 까다로운 자소서 항목 1위는 ‘지원동기’(40.3%)였다. 이어 ‘직무 역량’(35.6%), ‘실패 극복’(22.7%) 순이었다. 어떤 기업이든 자기소개서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들이다. P씨는 이 항목들에 대해 ‘솔직히 뻔한 질문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어떤 꿈을 가졌다기보다 월급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P씨가 구매한 '자기소개서' 관련 서적들. [사진=P씨 제공]


◆자소서 대행 업체도 등장···"학교 등 주변 제도 잘 찾아보면 유용해"

많은 취준생들이 자기소개서 작성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아예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는 업체도 등장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자기소개서’를 검색하면 대행업체 광고가 맨 위에 나왔다. 한 업체는 자기소개서를 대리로 써주는 사람을 ‘작가’로 소개하며 6만원에 1장 분량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준다고 설명했다.

P씨도 ‘자기소개서’라는 벽을 넘기 위해 큰마음 먹고 비싼 취업 학원을 다녔다. 효과는 별로였다. P씨는 학원 수업 과정에 대해 “학원에서는 ‘이런 문장은 된다’, ‘저런 내용은 안된다’라고 방법론적 이야기만 해줬다”며 “수강생이 많으니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구체적으로 첨삭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통상적인 코멘트만 하니 그렇게 도움이 안 됐다”고 말했다.

취준생들은 자기소개서를 ‘자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자기소개서에 소설의 특징인 허구적인 이야기가 담긴다는 의미다. 자기소개서 대행업체가 본인들을 ‘작가’라고 소개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이다. 

P씨는 일주일에 최소 1개 이상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일정 탓에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이 담긴 책을 손에 달고 살았다. P씨와 함께 스터디했던 사람들이나 주변 취준생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그런 P씨는 최근 공략을 바꿨다. 까다로운 자기소개서 작성에만 매달리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단다.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또 다른 취준생들에게 남기는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작은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도전해보려고 해요. 아직 학생이라면 학교 내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적극 이용하길 추천합니다. 취업 설명회나 학교 내 기관에서 자기소개서를 봐주는 경우도 있는데, 저처럼 이런 제도를 잘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요.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