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가 확바뀐 걸 野만 모르고 있었다
2020-04-23 17:49
[김세원의 천방지축] 집권여당의 압승으로 막을 내린 4·15 총선 결과에 대해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여유로운 과반으로 180석을 얻었다. 개헌(200석 이상 필요)만 빼면 법안·예산안 등 국회 안건을 단독 처리할 수 있는 의석수다. 반면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은 현재 122석에서 103석으로 쪼그라들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라는 보수야당의 기록적인 참패는 보수는 물론 민주당 지지자들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였다. 전체 의석(300석)의 5분의3을 차지하는 ‘공룡 여당’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내 혼란스러웠다. 전문가들의 예측이나 전망이 전혀 맞지 않아서다.
#선거에 정석은 없다.
‘투표율이 높을수록 야당이 유리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전국 단위 선거에서 네 번 연속 승리한 정당은 없다’, ‘대통령 임기 중반에 치르는 국회의원 선거는 정권 심판론이 좌우한다‘, ’공천 물갈이 비율(현역 교체율)이 큰 쪽이 승리한다‘ 같은 기존의 선거 법칙은 이번 선거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지구촌 경제를 멈춰 세운 '코로나19 블랙홀’이 모든 선거쟁점들을 빨아들여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총선 결과는, 인구 대비 자영업자 비율(24%)이 세계 최고 수준이고 핵을 가진 북한과 DMZ를 맞대고 있는 한 한국 정치의 주류는 보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동안 한국은 20~40대는 진보 성향 정당을, 60대 이상은 보수 성향 정당을 선호하는 '세대 투표' 경향이 큰 정치 지형을 갖고 있었다. 4·15 총선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56.4%, 30대의 61.1%, 40대의 64.5%가 민주당을 지지했고 60대 이상에서 통합당을 지지한 비율은 59.6%였다. 여기까지는 과거 총선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범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던 50대 유권자의 절반가량이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50대 유권자 중 민주당을 찍은 비율은 49.1%, 통합당에 투표한 비율은 41.9%였다. 이는 지역구 투표의 정당별 득표율(민주 49.9%, 통합 41.5%)과 거의 일치한다. 2016년 치러진 20대 총선에선 50대의 39.9%가 새누리당을 지지했고, 19.6%만이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했다.
50대는 민주당이 압승한 2018년 6월 지방선거부터 확실한 진보 지지층으로 돌아섰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TK(대구·경북)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광역단체장들이 50대에서 과반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 50대 표심, 정치지형을 바꾸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21대 총선 결과에 대해 “과거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경험한 '586세대(50대·80년대 학번·60년대 태생)'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정치지형이 진보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586세대는 6·25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억이 없고 시대적으로 민주화운동을 경험해 이념 면에서 진보 쪽의 주장에 거부감이 크지 않다.
엄 소장은 "40대였던 민주화운동권 세대가 50대가 되면서 50대의 정치적 성향이 변했는데 통합당은 5060을 함께 묶어 전략을 짜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몇 년 전부터 유권자의 정치 성향을 설명하는 기존 ‘연령 효과’(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경향)보다 ‘코호트 효과’(특정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 혹은 20대에 형성된 정치성향이 지속되는 ‘세대 효과’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386세대’가 50대로 진입했음에도 보수화되지 않고 중도 혹은 중도 진보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20대에 경험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뚜렷한 기억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유권자 수도 가장 많은 50대가 시간이 흘러 60대에 진입하게 되면 반공·친미로 요약되는 보수의 정서는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세대 효과’의 우위는 진보의 장기 집권을 이루겠다는 여당대표의 주장이 허언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지연·학연·혈연’에서 ‘새로운 부족(部族)’의 시대로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던 30대 청년정치인들은 현실 인식 부재와 공감 능력의 상실을 야당 참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2030세대는 샌드위치 하나를 먹어도 빵, 햄, 치즈, 야채, 소스를 일일이 따져 고르는데 통합당이 내놓는 건 1970, 80년대나 통했던 세트 메뉴뿐”이라는 한 후보의 이야기가 정곡을 찌른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저서 ‘부족(部族)의 시대’를 통해 포스트모던(후기 근대) 사회의 특징을 ‘신(新)부족주의’로 규정하고 타인과 공유하는 경험과 감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근대 이전이 생존을 위한 부족공동체 사회였다면 근대는 개인의 시대였으며, 후기 근대인 현대는 ‘새로운’ 부족의 시대이다. 씨족, 혈족 중심의 고대 부족이 아니라 문화, 스포츠, 성(性), 종교, 취미 등 다양한 관심사에 따라 수많은 소집단들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부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대중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쇠퇴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취미나 여가 등의 선택적 친목 그룹 혹은 정서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가는 변화를 마페졸리는 ‘신부족주의’로 설명한다. 서양의 근대가 합리적 개인에 뿌리를 두고 이성(理性)과 합리성(合理性)을 추구하는 탈주술화(脫呪術化)의 시대였다면 후기 근대에는 탈주술화 과정에서 배제됐던 소규모 사회집단의 발달, 감정과 감성의 공유, 디오니소스적 관능과 흥분 등이 ‘재주술화(再呪術化)’를 통해 일상생활로 회귀하고 있다.
인간은 집단에 소속돼 유대감·소속감·안정감을 찾으려고 하는 ‘집단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일단 어떤 집단에 속하면 그에 애착을 갖고 옹호하며, 소속 집단의 이익을 맹렬하게 추구한다. 부족의 원초적인 정체성은 인종, 민족, 지역, 종교, 분파 등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최근 저서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e)’에서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정체성에 근거해 투표한다”고 보았다.
SNS의 발달로 결성과 활동이 손쉬워진 새로운 부족은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부족은 언론계, 학계, 법조계, 지역 등 모든 곳에 존재하며 때로 편가르기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대중문화에서 정치로 확산된 특정 유명인에 대한 팬덤이나 ‘맘카페’, ‘일베’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도 모두 부족화 현상의 단면이다. 새로운 부족은 학연·지연·혈연 보다는 취향이나 가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집권여당 심판’, ‘자유민주주의 수호’ 같은 추상적 구호로는 부족 구성원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다. 민주당은 21세기 유권자 지형이 수많은 부족공동체로 이루어졌음을 간파했고, 보수야당은 그걸 몰랐다. 생계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돈을 나눠주고 하루빨리 전염병을 물리칠테니 힘을 실어달라는 부족장의 호소가 21대 총선의 성패를 갈랐다. <건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