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웹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에게 징역 1년 6월...n번방 만든 '솜방망이 처벌'
2020-04-01 08:00
"서버가 해외에 있어서", "피해자 특정 어려워서"...검경의 미온적 수사
국가 기관, 디지털 성범죄 심각성 인식 떨어져...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솜방망이 처벌'
수사 미뤄지는 동안 우리 주변 'n번방' 급증했다
국가 기관, 디지털 성범죄 심각성 인식 떨어져...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솜방망이 처벌'
수사 미뤄지는 동안 우리 주변 'n번방' 급증했다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았던 아동 성 착취 포르노 사이트인 '웰컴투 비디오'에는 한국인 운영자가 포함돼 있었다. 손모씨(24)가 바로 그 사람이다. 국제법에 따라 손씨는 국내에서 재판을 받아 유죄확정 판결을 받았다.
해외에서 적발된 다른 공범들에게는 최대 종신형까지 처해졌지만 하지만 손씨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그리고 그는 다음 달 출소를 앞두고 있다.
일제 강점기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연상시킬 정도로 참혹한 동영상을 만들고 배포한 그의 죄과치고는 너무도 가볍다는 지적이 다수, 이 때문에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손씨를 미국으로 압송해야 한다는 주장이 올라왔다.
미국은 아동 성범죄 영상을 다운로드해 보유하기만 해도 징역 5년 이상의 처벌이 가능하다. 손씨는 미국에서도 기소된 상태다. 이 청원에 29일 밤 12시 기준 이틀 만에 15만명이 참여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어린 시절 손씨가 정서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성장과정에서도 충분한 보호와 양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1년6월의 가벼운 형을 선고했다.
이처럼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아 왔다. 피해자가 아니라 피고인에게 이입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법원,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 어렵다며 수사조차 나서지 않은 경찰까지. 디지털 성범죄 처벌을 미뤘던 온갖 사례들이 지금의 n번방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이 거세다.
지난해 아주경제 기획취재팀이 취재한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학생은 본인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나체 사진에 합성된 일명 '지인 능욕' 사진이 유포되는 피해를 당했다. 사진은 트위터로부터 시작해 여러 SNS로 퍼졌다. 경찰서에 접수했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SNS 서버가 대부분 해외에 있어 현실적으로 수사가 쉽지 않다"거나 "동네 분위기가 나빠지지 않겠느냐"면서 수사가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이 '이상한 사진'은 음란 메시지와 전화로 이어지기 시작했지만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결국 피해자는 직접 '지인능욕' 사이트를 수소문하면서 가해자 잡기에 나섰고, 직접 가해자 한 명을 찾아냈다. 경찰이 해외 사이트 탓을 하고 있지만 범인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디지털 성폭력 수사에 미온적인 것은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준강간 혐의를 받는 한 회사원의 휴대전화에서 재판을 받던 사건과 별개의 불법촬영물들을 발견했다. 또 다른 범죄의 가능성이 있는 촬영물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당시 검찰에게 수사 진행 여부를 묻자 뜻밖에도 "대개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안 하는 게 관행이다"면서 "양형 사유로 삼을 뿐 별도로 기소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피의자가 누군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영상 속 피해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수사 미뤄지는 동안 우리 주변 'n번방' 급증했다
수사와 처벌이 지지부진하고 있는 사이, '소라넷'이 사라진 자리에 수많은 'n번방'들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정준영이 성관계 동영상을 불법적으로 촬영해 카카오톡 채팅방에 유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여러 오픈채팅방에서는 '희귀 유출 영상 24시간 업로드' 등의 문구가 담긴 음란물 광고가 올라왔다.
광고에는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 희귀 유출 동영상들을 볼 수 있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이른바 '빨간방', '야톡방(야한 카톡방)'으로 통하는 광고였다.
트위터, 심지어 유튜브에서도 키워드 하나만 검색하면 이러한 불법 촬영물 판매 광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해당 게시글에는 여성의 나체 사진 등과 함께 링크 혹은 '라인 아이디'가 포함돼 있었다. 영상을 원하는 경우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라는 것이다.
전문가는 사람들이 이러한 경로를 통해 'n번방', '고담방'과 같은 불법촬영물 공유 방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해외 플랫폼에는 불법 촬영물 공유 홍보 글이 버젓이 도배되기도 했지만 누구도 신고나 처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서 "(방 운영자들이)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람이 많은 곳 어디든 글을 올리고 홍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n번방' 외에도 여전히 이러한 방들이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국가 기관, 디지털 성범죄 심각성 인식 떨어져...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솜방망이 처벌'
지난해 11월 1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은 피해자를 강간해 성관계 동영상 촬영을 강요하고 이를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피고인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유는 같았다. 피고인이 사건 범행을 모두 인정하면서 반성하고 있고,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소년으로 향후 성행을 개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백광균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판사가 지난해 6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연구에 3차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2018년까지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단일 유죄판결 5699건 기준)에 대한 양형은 벌금형이 60.8%로 가장 많았다. 실형은 5.2%로 가장 낮았다. 징역형 집행유예가 28.6%, 선고유예가 5.4% 였다.
피해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하는 유포 범죄의 양형 또한 집행유예 32.81%, 벌금 31.25%, 징역 26.56%, 선고유예 9.38%에 그쳤다.
이처럼 디지털 성범죄에 솜방망이 처벌 관행이 이어지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지난해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국가 기관이 아직까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사법연수원 32기)는 "대개 강간이나 추행보다 불법촬영이 경미한 범죄라는 인식이 있지만 오프라인 성범죄보다 지속성 등에서 심각한 측면이 있다"며 "재판부가 아직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피고인이 이런 행위를 했지만 반성하고 있고 '뭘 잘 몰라서' 혹은 우발적으로 한 일이니 봐주자는 식의 가해자중심주의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이어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이 가해자들에게 '운이 나빠야 걸린다'는 인식을 퍼뜨릴 수 있다고 비판한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사법연수원 40기)는 "모든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랑 합의하지도 않았는데 막연히 집행유예를 내리는 등의 일이 반복된다면 '그런 일을 저질러도 감방갈일은 없겠네'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심각한 건 법원이 단순 촬영에 그친 범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유포에 대한 양형이 세게 나오는 건 유포를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건데 단순 촬영 범죄는 쌓여서 유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패러다임 대전환 필요"...n번방 이후 바빠진 검찰과 경찰
경찰은 n번방 사건이 화제가 되자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텔레그램 추적 기술적 수사지원 TF'를 조직했다.
검찰은 'n번방' 사건에 엄정하게 대처하기 위해 26일 검사 등 21명 인원으로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TF(태스크포스)를 꾸렸다.
이 TF에 합류한 서지현 검사는 2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까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일상 현실 세계에서의 범죄보다 굉장히 가볍다는 게 보통의 인식이었다"면서 "이제는 실제 현실 세계보다 가상현실에서의 범죄가 훨씬 잔혹하고 영구히 남는다"고 말했다. 현실 세계의 범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n번방 이후에는 디지털 성범죄를 가볍게 여기는 인식이 뿌리뽑힐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