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7%대 연속성장' 독주는, 끈끈.똘똘의 힘

2020-02-10 10:11
[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5)

[안경환 교수]



<베트남 ZOOM IN> 필자 안경환(安景煥) 조선대학교 교수 =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주경제는 최고의 베트남 전문가로 통하는 안경환 교수의 '베트남 ZOOM IN'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안 교수는 1955년 충북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의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휘장·평화우호 휘장을, 호찌민시로부터 휘호, 응에안 성으로부터 호찌민 휘호를 받았고, 베트남문학회에서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10월 12일에는 하노이 수복 60주년 기념으로 하노이시에서 '수도 하노이 명예시민'으로 추대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2017년 11월 20일에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 개교 6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동문 6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12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훈장을 수훈했다. 2014년부터 한국베트남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베트남은 신(新)남방 정책의 핵심국가이다. 베트남은 작년도 경제성장률이 7.3%를 기록하여, 아세안 국가 중 유일하게 2년 연속 7%대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쇄도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가 베트남 경제발전의 핵이다. 관광객 증가도 경제 발전에 한몫을 하고 있다. 작년도 베트남을 다녀온 한국인 관광객이 400만명을 넘었고, 금년도 베트남과의 교역액은 1000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경제협력 밀월시대가 도래하였다. 한국은 베트남과 900여년의 끈끈한 교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베트남과 한국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야 한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감독의 성공은 한국과 베트남의 협력관계에 있어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하였다. 베트남과 서로 협력해 나가려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베트남은 더불어 살 줄을 아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민족이다. 베트남의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이나 호찌민시의 떤선녓 공항에 내려서 시내 중심부로 가는 길에는 한국 업체의 대형 입간판이 즐비하다. 그리고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가 인상적이다. 자동차로 꽉 막힌 도로 이곳저곳을 택배 오토바이가 곡예 운전을 하며 질주하는 우리나라 상황과는 정반대이다. 이와 같은 한국과 베트남의 상반된 도로교통 사정은 양국의 경제적인 격차로 볼 수 있으나, 정확히 그 격차만큼 한국기업들에게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다. 경제발전 속도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다. 최근 국제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도 베트남은 2년 연속 7%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베트남은 13세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몽골 제국의 침략을 3차례나 막아낸 유일한 나라이고, 최강의 미국과도 맞서 싸우고 통일을 쟁취한 강인한 민족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자. 특히, 무엇이 베트남사람들을 강하게 하는가?

첫째, 토지숭배 사상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다.

반만년의 역사상 수많은 외침을 이겨낸 베트남 민족의 저력에는 토지 숭배 사상이 숨어 있다. 농경국가에서 토지는 바로 삶을 의미한다. 토지는 귀한 것이고 봉건군주시대에는 관리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먹고살도록 했다. 마을에 분배해 주고 세금을 거두는 공전, 병사들에게 지급한 토지를 병전, 고아들에게 나누어준 고아전, 가난한 학생과 훈장들에게 나누어준 학전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토지분배 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토지를 중시하는 전통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베트남이 어떤 전쟁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바로 토지 숭배사상이 가슴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토지숭배 사상을 연유로 베트남사람들은 흙을 먹는 풍습이 있었고,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흙을 먹기도 했다. 이 식용 흙은 3단계의 가공 단계를 거친다. 지하 깊은 우물에서 가라앉은 앙금을 퍼 올려서 강한 햇볕에 완전히 건조시킨 다음 훈제를 한다. 훈제는 향기가 많이 나는 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로 훈제를 한다. 기록에 보면, 1970년대까지 하노이 인근 시장에서 이 식용 흙을 사고팔 수 있었다.

둘째, 상부상조 정신이 단결력을 유도하여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베트남사람들은 지금도 유독 '계' 모임이 많다. 이는 계원들끼리 상부상조하자는 목적인데, 계모임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는 집짓기, 모내기, 추수, 결혼식, 장례식을 중요한 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손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상부상조 정신이 강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남을 도와주고 돈을 받는 행위 자체를 비도덕적인 일로 여기기 때문에 남을 도와주고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덕을 쌓는 것이고, 덕을 쌓으면 그 복이 자손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상부상조 정신은 전쟁에 임해서도 그대로 발휘되어 불패의 신화를 창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셋째, 끼어들기는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현상이다.

베트남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도로에 오토바이, 자전거, 씩로, 버스, 택시 등 갖가지 교통수단이 뒤엉켜 무질서함을 실감한다. 중앙선이 없는 곳이 많아 마치 개미떼가 움직이는 것 같은 교통상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도시에서 교통체증이 빚어질 때는 도로가 마치 콩나물시루 같다. 비가 오는 날이나 출퇴근 시간이 되면 도로 전체가 주차장이 된다. 교통체증이 심하기 때문에 보행자에게 차가 양보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로에서 베트남인들이 갖고 있는 나쁜 습관은 앞서기를 좋아하고 뒤를 따라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으로 수시로 충돌사고가 일어난다. 국도에서의 과속은 늘 일어나는 일이고, 그로 인해 매년 수천명이 사고로 귀한 생명을 잃는다.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도 서로 선두를 차지하려고 끼어든다. 왜 이런 끼어들기 현상이 벌어질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인의 공동체 심리의 특징을 이해하여야 한다. 끼어들기는 베트남사람들이 공동체의 안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것은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사람이 앞서가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그 위치로 올라가 앞지르기를 막음으로써 공동체의 안정을 찾으려는 심리가 무의식적으로 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로상의 복잡한 교통체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끼어들기 습관은 벼농사를 짓는 수도작 농경문화에서 발원한 것으로 법률을 중시하기보다 풍속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넷째, 체면중시 손님 접대문화는 농경사회 휴머니즘의 표현이다.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달랏’은 호찌민시에서 승용차로 약 4시간 걸리는 휴양지이다. 해발 약 1500m에 위치한 산악지방이라 상춘의 도시이자 꽃의 도시이다, 늘 쾌적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산악지방이라 과거에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물어 밤늦게 예기치 않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얼마나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자기를 찾아왔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멀리서 온 손님일수록, 오랜만에 온 손님일수록 극진한 접대를 받게 된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면 더욱 특별한 접대를 받게 된다. 베트남 사람들은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다. 인적이 뜸한 마을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더 손님을 귀히 여긴다. 베트남인들은 자신의 손님을 위해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음식을 준비한다. 집에 온 손님에 대해서 주인은 접대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하고, 간혹 자신의 경제적 능력 이상으로 접대한다. 만약 집이 좁다면 손님에게 가장 좋은 방을 주고 자신들은 응접실이나 부엌 심지어 남의 집에 가서 잠을 자기도 한다. 비록 나중에는 굶게 될지라도 손님에게는 최고의 성찬으로 대접하는 것이고, 돌아갈 때는 적당한 선물과 여비까지 주기도 한다. 베트남을 방문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베트남 사람들의 손님 접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 혹은 당과 국가조직의 공식적인 손님은 정중한 의례로 대접을 받기 때문에 베트남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손님 접대 풍습은 베트남 공동체 사회의 적극적인 면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논농사를 짓는 수도작 문화의 휴머니즘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사람들의 손님접대는 베트남인들의 명예를 중시하는 성격에서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다.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특히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 분수에 넘치는 손님 접대는 체면을 중시하는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다섯째, 뿌리 깊은 가부장제도는 전쟁에서 지휘계통 유지의 근간이었다.

가부장제는 농경사회의 오래된 풍습이다. 모계사회의 풍습이 남아있던 옛날에는 가부장제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관념에 기초하여 가부장제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현재 베트남의 각 기관과 조직은 당의 통제 아래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가부장제의 관념이 뿌리가 깊어 각급기관과 조직의 장은 자신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업무를 집행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 농촌에는 유교의 유입이 늦었지만, 농촌은 서양문화의 유입도 또한 늦었기 때문에 유교도 늦게 대체되었다. 그래서 농촌 지역에서는 면장이나 이장 등 일부 소수가 주민들의 의견을 묻기보다는 자의적으로 결정을 하는 경우가 있다. 주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 풍습은 베트남의 언어생활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베트남어의 인칭대명사는 모두 친족명사로 되어있다. 베트남인들은 사회관계의 호칭에서 가족관계의 친족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직장이나 조직 내에서의 호칭이 가족 관계에서의 호칭과 같다. 이것이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가부장적 성격을 나타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현재는 개방화되고, 외국인투자의 급증으로 국제화에 성큼 다가섰지만, 지도자급 인사들은 베트남이 통일이 되기 전에 대부분 게릴라전 전사들로 산속에서 생활해온 지휘관들이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된 것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농경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가 현대화되고 공업화되면서 쉽게 사라질 것으로 판단되지만, 뿌리 깊은 가부장제도는 전쟁에서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을 유지시켜 승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족의 3번에 걸친 침략을 어떻게 막아냈을까를 우선적으로 알아야한다. ‘국민의 단결력’이 외세를 물리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단결력은 외세배타적인 성향으로, 자국민이 무시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일치단결하여 시정을 요구하므로 자칫 외국인 투자기업에서는 노사분규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