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범위 좁아진 직권남용

2020-02-02 10:42
‘의무 없는 일’...구체적 판단기준 제시

대법원이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직권남용죄 적용의 문턱을 높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지난 30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81) 등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선고하면서 직권남용에 대한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직권남용죄는 ‘공무원’, ‘직권남용’,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함’, ‘사람의 권리행사방해’로 구성된다.

이번 판결의 쟁점은 ‘직권남용’과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함’이었다.

우선, 재판부는 ‘직권남용’에 대해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피고인들이 문체부 공무원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들에게 지원배제를 지시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공모해 대통령, 비서실장, 정무수석 등의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의무 없는 일’에 대해선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피고인들은 문체부 공무원과 공모해 지원배제를 지시해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로 하여금, ① 각종 명단을 송부하는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행위를 하게 하고, ② 예술위원장·예술위원에게 배제지시를 전달하는 행위, 지원배제 방침이 관철될 때까지 사업진행 절차를 중단하는 행위 등을 하게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직권남용에 해당하는 지시를 해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로 하여금 ② 부분 행위를 하게 한 것은 직원들이 준수해야 하는 법령상 의무에 위배되므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며 2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2심이 ①부분도 유죄로 판단한 것은 ‘의무 없는 일’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직권남용죄 적용에 있어 일반인과 공직자를 구별하는 구체적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일반인인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에 대응해 따라야 할 의무가 없으므로 그에게 어떠한 행위를 하게 했다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할 수 있다”며 “그러나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공무원이거나 법령에 따라 일정한 공적 임무를 부여 받고 있는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인 경우에는,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그가 직권에 대응해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 등의 내용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서로 간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게 통상적이다. 이런 관계에서 한쪽이 상대방의 요청을 듣고 협조하는 등의 행위를 ‘의무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새로운 법리를 내놓은 것은 최근 들어 여러 사건에서 직권남용죄가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주심인 안철상 대법관 등도 보충의견을 통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과잉 적용될 경우 직권남용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해 창의적·개혁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위축시키게 돼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공직자에게 예측가능성을 제공해, 관련 규정을 충실히 따른 행위에 대해선 책임을지지 않는 공직사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등 직권남용죄로 기소된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대법, 김기춘, 조윤선 2심 '다시'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부수석 등 7명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상고심 판결에 입장해 착석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