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로 "형님!" 말거는, 참 親韓(친한) 중국대사가 온다
2020-01-16 16:20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 내정자가 설 연휴 직후 서울로 부임할 예정이다. 싱하이밍 내정자는 1992년 8월 한·중수교 직후 서울에 부임한 첫 번째 그룹의 주한 중국대사관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95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근무한 후, 2003년에 다시 참사관으로 서울에 부임해서 3년간 근무했고, 2008년에 공사급 참사관으로 세 번째 서울에 부임해서 3년간 활동했다. 이번 서울 부임은 네 번째가 된다.
1964년생으로, 28세에 서울 근무를 시작한 싱하이밍 내정자는 올해 56세가 되어 다시 서울 근무를 시작한다. 북한 사리원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1986년 22세에 중국 외교부에 입부해서 1988년부터 3년간 활동한 첫 근무지는 평양이었다. 그는 2006년 두 번째 서울 근무를 마치고 임지를 다시 평양으로 옮겨 2년간 활동했다. 모두 34년간의 외교관 생활 가운데 본부 근무 5년과 주몽골 대사 근무 4년여를 제외한 25년을 한반도에서 활동했다. 중국 외교부 직원들은 그에게 ‘반도통(半島通)’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92년 서울에 부임할 때 평양 말투를 구사했던 싱하이밍 내정자의 말투는 2011년 세 번째 서울 근무를 마치고 베이징(北京)으로 귀임할 때 서울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 싱하이밍 대사가 서울에 부임하면 처음으로 서울말을 구사하고 한국 사정에 밝은 ‘코리안 스쿨’ 주한 중국대사가 부임하게 된다. 싱 내정자의 부임으로, 앞으로 주한 중국대사에는 평양스쿨과 재팬스쿨의 시대가 끝나고, 서울스쿨 출신으로 한국 사정에 밝고 서울에서 외교관 커리어를 쌓은 중국 외교관들이 줄지어 부임할 전망이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체결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는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이 서명했다. 이상옥 장관이 2002년에 낸 회고록 ‘전환기의 한국 외교’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1984년 남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 주변 4강과의 교차수교 방안을 세우고 이에 따라 중국과의 수교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를 출간한 첸치천 부장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은 1985년 당시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첸 부장에게 직접 “중국과 한국의 관계 발전은 경제 발전에도 유리하고,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끊어 중국의 통일에도 유리하다”는 지시를 함으로써 한국과의 수교 방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교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사흘 뒤인 1992년 8월 27일 서울과 베이징에는 양국 대사관이 설치됐고 초대 주중 한국대사로는 노재원 대사가, 초대 주한 중국대사로는 장팅옌 대사가 부임했다. 서울에 부임한 장팅옌 대사를 비롯한 주한 중국대사들은 두 나라 사이의 언어 습관과 역사문제 때문에 종종 한국 언론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상옥 장관 회고록에 따르면, 초대 장팅옌 대사는 1992년 10월 9일 한국 언론들과의 첫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 문제와 관련하여 수교 교섭 과정에서 유감을 표명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는 것이며, 중국이 그럴 필요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해 중국의 한국전 참전 문제에 관한 “논란을 재연(再燃)”시켰다. 장 대사는 10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 협회 초청 조찬간담회에 참석해서 다시 이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한·중 양국은 수교 교섭과정에서 이 문제에 관해 서로의 입장을 개진한 바 있다”고 밝히고 “그 전쟁에는 당시의 사정이 있어 중국이 부득이 참전하게 되었으며, 한·중 양국은 이제 과거를 논의하기보다 미래의 과업을 위해 공동 노력할 때가 됐다”고 말해 논란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싱하이밍 내정자 역시 2004년 5월 20일에 타이베이(臺北)에서 열린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취임식에 여야 국회의원 몇 명이 참석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지자 이들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참석하지 말라”고 말했다가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곤욕을 치렀다. 당시 공사급 참사관이었던 싱하이밍 내정자는 필자와 만났을 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고 물었고, 필자는 “그런 말을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말하면 내정간섭이 된다”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가까운 한국인들에게 "형님!"이라며 다가갈 정도로 붙임성이 좋은 싱하이밍 내정자는 “평소에 잘 아는 의원들이라 친근한 방법으로 권유하려고 했던 건데···”라며 난감해했다.
초대 장팅옌 대사와 싱하이밍 내정자가 겪은 경험은 이른바 재팬스쿨 출신의 일본통 주한 중국대사들은 겪지 않았다. 한국어를 모르거나 기초적인 한국어밖에 구사할 줄 몰라 공식 석상에서는 한국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받지 않았다는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재팬스쿨 출신의 제2대 우다웨이 대사는 초대 장팅옌 대사로부터 말을 전해들었는지 2008년 서울 부임 직후 필자와 만났을 때 중국어로 “나는 말갈족 출신이라 곧이곧대로 말하는 습관이 있으니 새겨서 듣고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웃으며 건네기도 했다.
싱하이밍 대사의 성씨인 싱(邢·형)은 중국 내 인구 비례로 131위에 올라 있는 성씨로, 전체 동성(同姓) 인구의 31%가 주로 허베이(河北)와 허난(河南)성에 거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3000년 전 주(周) 나라 제후로 봉해진 일족으로, 우리 민족과 연원이 닿아 있는 동이(東夷)와 혈연이 있거나 동이들과 가깝게 지내온 성씨이다. 싱하이밍 내정자는 외교관답지 않게 우회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의사 표시와 감정 표시를 하는 성격으로, 싱하이밍 내정자와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이 도대체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와 공통점이 많은 성격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싱하이밍 내정자가 부임 이후 해결해야 할 난제(難題)들은 언어 표현의 문제를 넘어 국제정치의 변화가 가져다 준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서로 표현을 삼가고 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있는 사드(THAAD) 문제를 비롯, 미국이 아직 구체적인 표현은 안 했으나 조만간 구체적인 요청을 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중거리핵미사일(INF)의 한반도 배치 문제, 남중국해의 미·중 간 갈등, 최근 완화되기는 했으나 전망이 불투명한 미·중 무역전쟁 등 싱하이밍 내정자 앞에는 ‘고난의 바다(Troubled Water)’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서울로 부임하기 전 몽골 주재 대사로서 4년 4개월 동안 쌓은 경험이 싱하이밍 대사를 성숙한 외교관으로 성장하게 했을 것으로 서울에 있는 많은 싱하이밍 친구들은 기대하고 있다. ‘반도통’으로서 서울과 평양을 떠나 울란바토르에서 한반도를 멀리서 조감(鳥瞰)하며 한반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최초의 ‘코리안 스쿨’ 출신 주한 중국대사로서 훌륭한 다리(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역할을 해줄 것을 아울러 기대하고 있다. 싱 내정자는 특히 중국 외교의 아버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교훈으로 남긴 ‘구동존이(求同存異)’와 28년 전 한·중 수교 당시 양국 정부가 합의정신으로 제시한 ‘수도거성(水到渠成·물이 흐르면 물길이 생긴다)’, 영어로는 ‘Look forward to’의 정신으로 임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