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형의 불온한 정치] 사라진 담론 자리에 '계수 전쟁'만이…"우리 시대 지식인을 찾습니다"

2020-01-09 18:15
극한 진영논리, 지식인 숨바꼭질 판으로 내몰았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박노해의 옥중사색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

종적을 감췄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력이라는 거대한 탑에서 돌멩이 하나가 빠졌다. 작은 균열이 몰고 온 나비효과는 컸다. 견고했던 탑은 이내 휘청거렸다. 제 아무리 돌멩이를 쌓아도 다시 빠진다. 우리 시대의 '양심 있는 지식인' 얘기다.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진보 지식인이,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보수 지식인이 시나브로 사라진다. 내부 총질 불가론을 떠받치는 '진영 논리'가 그들을 숨바꼭질 판으로 내몬다. 지식인이 사라지자, '정치 리더십 공백'만이 판친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생산적 담론은 온데간데없고 진영 논리라는 무한한 쳇바퀴가 사회 전반을 짓누른다. 사회 전체로 보면 '죄수의 딜레마'다.

◆진영논리가 강화되자, 체제 논쟁이 사라졌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 [사진=연합뉴스]


지식인 자리에는 이른바 '계수 전쟁'이 치고 들어왔다. 정치도 경제도 '숫자의 굴레'에 갇혔다. 매주 발표되는 여론조사(정치)나 통계청의 월별 수치(경제)에 따라 공격수와 수비수만 나뉠 뿐,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생산적 담론은 종적을 감췄다. 숫자 권력에 인질로 잡힌 비극만이 남았다.

그 사이 문재인 정부는 위기를 맞았다. '조국 사태'로 촉발된 레임덕(권력누수)과 집권 4년 차 증후군은 한 단면에 불과하다. 오는 4·15 총선을 앞두고 곳곳에서 문재인식 개혁안이 좌초되고 있는 게 진짜 위기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경제·사회 개혁은 검찰 개혁에 밀렸다.

특정 이슈의 '과잉 대표'가 정국을 휩쓸면서 정부 개혁안은 한낱 종이 포장지로 전락했다. 민주정부 3기의 명분도 희미해졌다. 이는 우리 사회 전체 위기로 확산됐다.

문제 제기 하나. "경제체제 논쟁이 사라졌다." 여권의 한 관계자가 최근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여기에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임명 후에도 경제 체제 논쟁이 전무하다는 비판적 인식이 깔렸다. '재벌개혁 전도사'가 청와대 요직을 차지했는데도, 신(新)체제를 향한 생산적 담론이 없다는 진보진영 내부의 절망감도 엿보인다.

김 실장은 97년 체제 이후 재벌 개혁에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한국 경제체제 논쟁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다. 그는 1999년 참여연대 재벌감시단장 시절 장하성 주중대사와 함께 소액주주운동과 주주 행동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재벌 대타협론'을 주장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와는 달리, 재벌·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신랄히 비판했다. 장 교수의 주장은 '저개발 국가의 경제발전'에 국한된 편협한 시각이라고 일축했다. "삼성과 이건희를 구분 못 하냐"는 논쟁도 이 과정에서 촉발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진보 지식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민주정부 2기였던 참여정부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부동산 원가 공개,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놓고 진보진영 내부에서 격렬한 전쟁이 일어났던 것과는 딴판이다. 

◆정치, 계수 뛰어넘는 '예술 영역'
 

문재인 대통령이 9일 포항 포스코 스마트공장 제어실에서 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후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최정우 회장. [사진=연합뉴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대표적인 진보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당시 성공회대 교수였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은 '진짜 진보' 논쟁을 놓고 한판 붙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까지 진보 논쟁에 뛰어들면서 체제 논쟁은 극에 달했다.

진보 논쟁에 불을 댕겼던 최 교수는 참여정부를 '실패'로 규정한 뒤 "'운동정치(포퓰리즘)'의 지나친 의존이 정치를 무력화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참여정부가 특단의 대안 마련에 실패한다면,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으로 정권 이양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조 교육감은 최 교수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다"고 각을 세웠다. 조 교육감은 참여정부가 사회적 힘을 끌어내는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쓰지 못한 것이 실패 원인이라고 반박했다.

손 교수는 최 교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문제를 풀려는 것은 코미디"라고 말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이들의 주장을 '교조적 진보'로 규정하며 '유연한 진보론'을 설파했다.

문제 제기 둘. 청와대도 여야도 여론조사 딜레마에 빠졌다. 여론조사는 1987년 직선제 대선 이후 본격화했다. 여론조사 딜레마의 핵심도 '계수 전쟁'이다. 매주 쏟아지는 여론조사에 한국 정치가 '숫자 권력'의 덫에 빠졌다.

탄핵으로 불명예 퇴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 지지율의 '심리적 마지노선(40%)'을 기준점으로 삼고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지율에 민감하기는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치는 '숫자 밖에 있는 예술의 영역'이다. 말 하나로 갈등은 한순간에 없애는 '예술'이다. 정치권이 이미지 정치에만 골몰한다면, 희망은 없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새로운 체제를 위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생산적 담론을 끄집어낼 '메신저'가 절실하다.

메신저가 오작동하면,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는다. 구체제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메신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의 양심 있는 지식인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