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소음을 규탄합니다" 세밑 광화문광장에서
2019-12-31 11:56
광화문광장주민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의 가상대화
1971년 김지하 시인은 구리투구와 갑옷을 답답해하는 이순신 동상과 그 앞을 지나던 엿장수와의 대화로 이뤄진 단막 희곡 ‘구리 이순신’을 발표했다. 2019년 세밑 필자는 세종대왕과 충무공 동상 간의 가상 대화로 광화문광장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충무공: 전하, 오늘이 기해년(己亥年) 마지막 날이옵니다. 제가 51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올해처럼 광화문광장이 시끄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 과인 또한 주말마다 온갖 소음에 시달려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2009년 8월 광화문광장이 조성될 때 취지가 누구에게나 열린 화합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는데, 각종 단체가 주장을 쏟아내는 '해방구'가 되면서 막말과 정치 구호가 난무하는 갈등과 투쟁의 공간이 되고 말았소.
충무공: 편하게 말씀을 나누기 위해 소인이 전하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윤허하여 주십시오.
세종대왕: 우리 사이의 거리가 250m, 둘 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소?. 우리 사이에 놓인 150년의 세월과 군신(君臣)이라는 신분상의 격차는 요즘 세상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소. 요즘 과인과 노비 출신 장영실과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그린 ‘천문: 하늘에게 묻는다’라는 영화도 나왔다고 하지 않소?
충무공: 황공하옵니다. 한성부(서울시)의 허가내역을 기준으로 하면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연간 집회·행사 횟수가 2011년 15건이었으나 2017년(220건)과 2018년(208건)에는 연속 200건을 넘었다고 하더이다. 지난 7월 기준으로 109건이었다고 하니 올해도 200건을 넘을 것 같사옵니다.
세종대왕: 2017년 5월 광화문광장의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권좌에 올랐는데도 시위와 집회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까닭을 모르겠소.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일년 내내 험한 글과 그림을 적은 현수막을 내걸고 사방팔방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터져 나오는 ‘악다구니’ 외침은 보고 듣기가 괴롭기 짝이 없소. 이런 모습을 보려고 과인이 한글을 창제했나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오.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한글을 만든 것은 백성들의 소통의 어려움을 해소하여 민의를 하나로 모으고자 함이었는데 말이오. 아이들과 바람 쐬러 나왔던 가족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되돌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소.
세종대왕: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구려. 광화문광장이 한성(서울)에 있다 하여 한성부(서울시)만의 소유가 아닐진대, 한성판윤(서울시장)은 어찌하여 그런 자들에게 집회허가를 내주었단 말이오?
충무공: 망극하옵니다. 소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왜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백성들과 어울리며 지형과 해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일본군의 정세를 탐지했던 유비무환의 정신 덕분이온데 지금 청와궁의 문재인대통령은 국제 정세에 눈 감고 귀닫고 북쪽의 김정은만 짝사랑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세종대왕: 공이 처음 이곳에 왔을때 상황은 어떠하였소?
충무공: 황공하오나 소신의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사옵니다. 조각가 김세중 서울대 미대교수가 제작한 청동입상으로 기단(10.5m)과 동상(6.5m)을 포함한 전체 높이가 17m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습니다. 원래 여기에는 미술대학생들이 만든 37기의 석고위인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66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총재로 하는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가 발족하여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신과 전하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였답니다.
세종대왕: 과인이 듣기로는 뻥 뚫린 세종로와 태평로를 통해 남쪽에서 들어오는 화의 기운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왜적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공이 동상 인물로 선정됐다고 하더이다. 같은 무장 출신인 데다 극일(克日)의 상징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박 대통령의 공에 대한 사랑이 매우 각별했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오?
충무공: 1967년 광화문네거리와 태평로 등에 지하도가 건설되면서 서울역에서부터 광화문까지 2.2㎞의 도로 위를 자동차만 다니던 이곳에 2009년 8월 광화문광장이 완공됨으로써 세종대로 한복판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걸어다니게 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세종대왕: 그렇소. 광장은 기본적으로 열린 마당이어야 하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이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1987년 6월항쟁 이후 광화문광장은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소. 2016년 10월 29일부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된 3월 10일까지 19차례의 촛불집회가 열려 결국 박 대통령이 하야하기에 이르렀소. 광화문광장은 이처럼 민의가 결집하는 참여민주주의의 보루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서로 다른 가치와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충돌하고 온갖 욕구가 분출하는 곳이기도 하오. 광화문광장이 특정한 집단들이 정치적 목적과 이념을 펼치는 점령공간이 되어버린 것은 2014년 7월 세월호참사 가족대책위원회가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을 세웠을 때부터가 아닌가 싶소.
충무공: 전하, 우리 백성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도시의 중심광장이옵니다. 광장은 그 민족의 정신을 담아야 하옵니다. 세계 주요국 광장의 중심에는 예외없이 구국 영웅, 건국대통령 동상 같은 역사적 조형물을 세워 백성들의 마음속에 민족의 자부심과 조국애를 심어주고 있다 하옵니다. 세계로 뻗어나간 한류 열풍의 근원은 한글이옵니다. 그런 한글을 창제하시고 문화융성을 이끌었던 전하께서 광화문광장 한가운데 계시는 모습은 국민 모두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줄 뿐 아니라 이 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도 깊은 관심과 감동을 줄 것입니다. 소신의 새해 소망은 광화문광장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정신을 일깨우는 사색과 휴식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옵니다.
세종대왕: 과인은 “중국과 다른 글을 쓴다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14차례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한 최만리를 위해 3년간 부제학 자리를 비워둘 정도로 그를 아꼈다오. 과인은 한글 사용을 반대하는 최만리의 논리에 대응하며 그때마다 한글의 허점을 보완하고 당위성을 정교하게 개발할 수 있었소. 경자년(庚子年) 새해에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적폐(積弊)로 몰아 쳐내고 자기편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감싸고 요직에 앉히는 적대와 증오의 ‘진영 정치’가 부디 중단되었으면 좋겠소. 잠시 후면 시작될 보신각 타종소리를 들으며 이를 천지신명께 기원해 볼 작정이오. <논설고문·건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