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 ⑤ 마리아 칼라스가 묻힌 바다, 그리운 에게海

2019-12-19 07:22
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 5

 

[마리아 칼라스] 

 
이번에는 ‘하늘이 내린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를 따라 지중해를 탐색할까 합니다. 그가 ‘지중해의 여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중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보여주듯, 거칠고 영민하며 때로는 세련돼 보이는 마초들의 바다였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구출해주고, 그가 20년 만에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절대적 ‘멘토’는 여신인 아테나였는데도 지중해의 역사와 전설은 여인들에게 인색했습니다. 두툼한 지중해 역사서 <위대한 바다>(이순호 역, 책과 함께)의 저자 데이비드 아블라피아는 “모든 분야에서 젠더 논쟁이 불붙는 실정이지만, 그래도 지중해의 역사에 여자의 역할은 미미했다. 지중해는 남자의 바다였다”라는 입장을 비칩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지중해 남자’들의 특색이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한 것이라면 평생 이러한 삶을 살았던 칼라스를 ‘지중해의 여자’라고 불러서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칼라스는 1923년 12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에서 이민 온 부모가 미국 도착 직후 출산했습니다. 그리스가 원산지인 미국사람인 거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활력을 의심하던 끝에 열네 살 된 칼라스를 데리고 그리스로 돌아왔습니다. 딸의 목소리가 남다른 걸 안 어머니는 그를 아테네 국립음악원에 집어넣습니다. 어머니 덕에 재능이 발견되고, 정식 음악공부도 할 수 있게 된 칼라스는 어머니의 끝없는 잔소리와 간섭, 욕구 불만에 부딪힙니다. 먹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려 합니다. 십대 중반에 175㎝에 85㎏이나 되는 거구가 됐으나 워낙 노래가 좋은 데다, 맡은 역을 철저히 준비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 이 단점을 가려줬습니다.
아테네에서 ‘비극적 소프라노’,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갑니다. 원래 그는 허영심 많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했습니다. 미국에서 무대를 찾았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코끼리 같은 몸’, 어머니와 다투면서 길러진 불같은 성격, 내 목소리를 싸구려로는 팔지 않겠다는 절대적 자존심이 미국 무대 진출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레나’라는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오페라 연출가의 눈에 들어 지중해에서 한 시간 남짓 들어간 베로나로 진출합니다. 여전히 몸은 컸지만 이탈리아 청중들은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기막힌 목소리, 그 목소리를 구사하는 고난도의 기교, 철저히 준비한 비극적 표정과 연기에 빠져든 겁니다. 처음 서 본 이탈리아의 무대에서 스물네 살 칼라스는 성공을 거두지만 워낙 출연료가 작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습니다. 칼라스는 자기에게 잘해주는 메네기니라는 베로나의 부자에게 끌립니다. 칼라스보다 서른 살 많은 그는 칼라스가 돈이 될 걸 알고 자기 사업은 팽개치고 매니저 역할을 자원합니다. 아버지처럼 다정히 대해주는 메네기니에 더욱 깊이 빠진 칼라스는 그와 결혼합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찾은 칼라스는 이탈리아의 이름난 오페라무대를 하나하나 정복합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오페라 무대인 밀라노의 스칼라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레나타 테발디(1922~2004)라는 스칼라의 프리마돈나 때문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청중들은 자기 나라 출신이며 몸매가 날씬하고 연기가 아카데믹하며 교양과 매너가 좋은 테발디를 그리스 출신인 칼라스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라스는 드라마틱한 연기와 감성 전달은 테발디보다 뛰어났지만 92㎏나 되는 체중, 공격을 받았을 때는 즉시 몇 배나 더 신랄하게 되갚아주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스칼라에서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1950년 감기에 걸린 테발디의 대역으로 스칼라에 설 기회를 얻었으나 긴장과 컨디션 난조 탓에 기대했던 환영은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칼라스의 인기가 이탈리아 전역과 미국 등 해외에서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자 스칼라는 1951년 그에게 무대를 한 번 더 내줬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칼라의 까다로운 청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철저한 연습과 준비 덕이었다지요. 최고 스타이면서도 리허설에는 가장 먼저 나와 목소리를 맞춰보고 동선을 점검하고, 시선을 어디에 둘지 마음에 들 때까지 거듭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것도 가장 늦었고, 이 때문에 출연자들과 스탭 일부는 그를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테발디까지 밀어낸 그는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 주인공 오드리 헵번(1929~1993)의 날씬하고 가냘픈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몸을 그렇게 가꾸겠다고 결심합니다. 열한 달 만에 35㎏ 감량에 성공한 그의 인기는 전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어떤 의상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날씬한 몸매, 눈과 입을 강조하는 짙은 화장. 달라진 그의 모습에서 뿜어지는 연기의 비극성은 전보다 더 감동적으로 진화했습니다. 1955년 스칼라에서 그가 비극적 오페라 <마농레스코>에서 마지막 아리아 ‘홀로 버려지고’를 애절하게 끝내자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라 디비나!”라며 열광했습니다. ‘천상의 디바’라는 뜻입니다. 청중들은 “디바!”라는 호칭보다 더 고귀한 호칭을 찾아낸 겁니다. 이 이야기는 앤 에드워드가 쓴 <마리아 칼라스-내밀한 열정의 고백>(김선형 역, 해냄 출판)에 나옵니다.

그는 점점 나이 많은 남편을 경원하게 되는데, 자기가 벌어놓은 돈을 남편이 마음대로 써버려 남은 게 별로 없게 된 것도 원인이었습니다. 칼라스는 당대 세계 최고의 부자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1906~1975)에게 빠집니다. 침실을 온통 금으로 치장한 초호화 대형 요트에 세계의 명사와 귀부인, 미녀들을 태우고 지중해 서쪽 모나코 항구에서 동쪽 터키의 이즈미르까지 보석처럼 깔린 아름다운 항구와 크고 작은 섬에 마음 내키는 대로 정박했다가 떠나며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던 오나시스 역시 그리스 출신으로,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고 막대한 부를 이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역시 ‘지중해의 남자’였습니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카리스마와, 세계 최상위 계층의 라이프스타일에 빠지고, 오나시스에게 빠집니다. 오나시스도 칼라스가 자기처럼 역경을 딛고 세계의 프리마돈나로 등극한, 같은 그리스 사람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둘은 공연 여행을 같이 다니고, 공연이 없을 때는 요트로 지중해를 순항하며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칼라스는 오나시스가 자기 왕관을 꾸미기 위해 수집한 수많은 여인 중 한 명이었을 뿐입니다. 오나시스는 암살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오나시스와 결혼, 왕관 장식을 끝내버립니다. 오래도록 그의 청혼을 기다리며 마담 오나시스 행세까지 했던 칼라스는 평생 연기해온 비극 오페라 주인공들처럼 처절한 운명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다가 1977년 약물과다로 세상을 떠납니다.

칼라스는 언제나 ‘디비나’의 모습으로 무대에 섰겠지만 나는 1960년 그리스의 에피다우루스 야외극장에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대표적 아리아인 ‘정결한 여신(Casta Diva)’을 불렀을 때의 칼라스가 가장 ‘디비나’ 같았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에피다우루스 극장은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거리, 지중해로 돌출해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습니다. 기원전 340년, 에게 해가 멀지 않은 산속에 건설된 이 극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사진으로 본 모습은 웅장합니다. 위로 갈수록 높아지는 구조인데, 14,000명이 앉을 수 있습니다. 직경 20m인 저 아래 무대에서 낮게 기침하는 소리도 제일 꼭대기, 맨 가에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24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음향기술이 있을 수 있었는지!

이야기가 두서없어집니다만, <노르마>의 주인공 노르마는 로마의 통치를 받던 갈리아라는 곳의 토속 종교인 드루이드교의 여사제입니다. 노르마는 로마 총독 폴리오네와 남몰래 사랑에 빠져 아들을 둘이나 낳았습니다. 사랑과 아들들을 지키려고 로마군을 공격하려는 자기 종족을 사제의 자격을 앞세워 만류합니다. 이때 노르마는, 이 곡을 제대로 부를 수 있다면 다른 아리아는 어떤 것도 잘 부를 수 있다는, ‘정결한 여신’을 부르지요. 하지만, 노르마가 사랑한 로마 총독은 다른 여자에게 빠지고, 노르마는 복수심에 불타 그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를 죽이려 듭니다. 드루이드족은 뒤늦게 노르마가 원수인 로마 총독을 사랑하고 아이까지 있는 걸 알고는, 즉 노르마가 ”정결하지 않은 여사제“인 걸 알고는 화형대에 묶습니다.

칼라스의 노르마 역은 정말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1948년에 처음 연기한 이후 평생 88번 이 역을 맡았는데, 그의 노르마 빙의(憑依)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칼라스와 노르마는 불멸의 쌍둥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칼라스가 이 노래를 여사제처럼, 여신처럼 불렀다는 말이겠지요. 여러 해 전 에피다우루스 극장을 찾았던 한국의 여행가 한 분이 1960년 노르마 공연 때 칼라스의 목소리에 빠진 이후 평생 그의 ‘제사장’으로 살아온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자기 여행기에 남겼습니다.

“나에게 에피다우루스 극장 관리인 기에르기에스 씨가 웃으며 다가왔다. 30년이나 여기서 일했다는 60대 초반의 그는 극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곳이 세계 최고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어떤 것이었냐고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마리아 칼라스의 공연이었죠. 제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온통 난리가 났죠. (생략)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죠. 노래가 끝나자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답니다.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어요. 그때 전 (여신 칼라스의 사제가 되어) 이 극장에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했답니다 라고 대답했다.”<꿈꾸는 여유, 그리스>(권삼윤, 푸른숲)

이야기가 길어집니다만, 파니 아르당(1949~ )이라는 프랑스 배우가 있습니다. 아르당은 2007년 개봉된 <칼라스 포에버>라는 영화에서 칼라스를 연기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르당은 나이 들어 젊음과 목소리와 인기와 사랑(오나시스)을 잃고 좌절 속에 빠진 칼라스가 음악의 힘에 기대어 비제의 <카르멘>을 젊은 가수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한창 때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명연기를 보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올 여름 한국의 칼라스 팬들을 감동시킨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아 칼라스:세기의 디바>의 내레이션도 맡았습니다.
다비드 르레라는 전기 작가가 칼라스 전기를 쓰려고 아르당을 만나 물었습니다. “당신이 칼라스와 닮았다고 생각합니까?” 아르당은 “내가 칼라스와 닮았는지는 모르겠어요.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은 미국 배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칼라스 역만은 지중해 연안 출신의 배우가 맡아야 한다고 했어요. 칼라스나 나는 둘 다 키가 크고 갈색 머리에다 골격도 크고 지중해 연안 사람이라는 특색이 있긴 하죠”라고 대답했습니다.<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다비드 르레 지음, 박정연 역, 이마고)

칼라스의 유해는 그리스 남쪽 푸르디푸른 에게 해에 뿌려졌습니다. ‘지중해의 여인’에서 ‘지중해의 여신’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칼라스 에피다우루스 극장 공연 기념 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