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묵시록']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019-11-28 17:07
# 4·19 세대와 유신 시대, 광주민주화 세대와 2019년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중략)/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중략)/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중략)/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문득, 아주 새롭게 다가오게 된 이 시에는 두 개의 시간이 기입되어 있다. 1960년 12월 어느 날과 1978년 겨울 어느 날이다. 4·19의 세밑에서 만난 때는 학창시절이었고, 1978년의 세밑은 유신체제로 종신집권을 다지던 박정희 권력 아래 실시된 12·12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했던 때이다. 이 사태는 이듬해 부마항쟁을 부른다.
# 586, 그 옛사랑은 어떻게 그림자가 되었는가
하지만 혁명의 추억이란 희미한 옛사랑은, 그때 돌멩이를 쥐고 화염병을 던지던 세대에게도 정확하게 그 모양새의 그림자가 되어 돌아왔다. 최근 조국사태 이후 들끓듯 일어난, 586세대를 향한 분노는 무엇일까. 박정희 사후 10년의 민주화 동지들이 그 희미한 옛사랑을 발판 삼아 이 사회의 양지와 노른자위를 누리면서 다른 세대에게 돌아가야 할 당연한 기회마저 빼앗은 이기주의적 세대를 기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이 까발려준 586의 부도덕하고 가식적인 민낯은 이제 일반화하여 세대 전체의 아웃을 외치는 상황을 낳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예사롭지 않은 묵시록이다. 우린 이제 희미한 옛사랑의 수완 좋은 세대가 어떻게 일그러진 그림자가 되어 왔는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