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시론]'난 미친 사람이고 싶다' 손정의 정신
2019-11-12 00:02
"어느새 이렇게 늙어버렸지···."
2016년 5월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한 사내가 거울을 보며 탄식했다. "나는 이미 시들어버린 걸까."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겸 사장은 이듬해 8월 11일 환갑을 맞아 은퇴할 계획이었다. 구글 출신 니케시 아로라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부사장으로 불러들였을 만큼 의지가 확고했다. 은퇴 시기가 임박하자 4년 전 후회가 밀려왔다. "사업가로 이름을 올렸다면 세계 제일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입버릇처럼 해온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손 회장은 결국 은퇴 계획을 접었다. 아로라와도 결별했다. 4년 전의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2012년 휴대폰이냐, 그 다음이냐를 두고 고민한 손 회장은 휴대폰을 택했다. 이듬해 미국 3위 이동통신사 스프린트넥스텔을 216억 달러(약 25조원)에 인수했다. 4위 업체 T모바일까지 담으려 했지만, 미국 정부의 반발로 실패했다. 스프린트와 T모바일은 최근에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합병 승인을 받았다. 그 사이 두 회사는 순위가 뒤집혔고, 손 회장은 합병 조건으로 통합회사 운영권을 양보해야 했다. 막대한 손실도 뒤따랐다.
손 회장은 1981년 컴퓨터 소프트웨어 도매사업을 시작했다. 1986년 작은 벤처에 불과하던 마이크로소프트(MS)를 발굴해 소프트웨어를 일본에 독점 판매하며 큰돈을 벌었다. 대형 인수·합병(M&A)과 지분 투자를 반복하며 회사를 키웠다. 1996년에는 창업 6개월밖에 안 된 야후의 지분을 인수하고 야후재팬을 세웠다. 야후는 문을 닫았지만 야후재팬은 일본 포털 1위로 자리잡았다. 1999년에는 역시 6개월차였던 알리바바에 2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손 회장이 당시 마윈 알리바바 회장을 만나 5분 만에 출자를 결정한 일화는 유명하다. 2000년 브로드밴드 사업에 진출한 소프트뱅크는 2006년 일본 3위 이동통신사 보다폰재팬을 인수해 아이폰을 독점 판매하며 몸집을 불렸다. 휴대폰은 그만큼 만만한 사업이었다. 손 회장은 2012년 선택에 대해 "눈높이를 더 높이지 못했다"며 "안정적인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도망쳤다"고 회고했다.
은퇴 계획을 번복한 손 회장은 2016년 7월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인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320억 달러(약 37조원) 전액 현금 거래였다. 주당 43%의 웃돈(프리미엄)을 부담하면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10년 후 가격의 10분의1에 산 것이라며 흐뭇해했다. 그러면서 "50수 앞을 내다보고 돌을 던졌다"며 "앞으로 20년 안에 ARM이 설계한 반도체가 1조개 이상 지구상에 뿌려지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 세계 스마트폰의 90% 이상이 이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를 쓴다.
손 회장이 '50수를 내다본 포석'이라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 그는 모든 물건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시장의 잠재력에 오래전부터 주목해왔다. IoT의 두뇌인 반도체를 설계하는 ARM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게 이미 10년 전이었다고 한다. 회사에는 ARM을 인수하기 위해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해두라는 극비 지령까지 내려뒀던 것으로 전해진다. 손 회장은 ARM 인수를 시작으로 새로운 도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로라와 헤어졌다. 그는 "욕심이 생겼다. 엄청난 '패러다임 시프트'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 내 소임이 아직 덜 끝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손 회장은 ARM을 손에 넣은 뒤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빅픽처'의 포석들을 정조준해 사들이고 투자하기 시작했다. ARM이 모바일 인터넷시대 플랫폼을 장악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2017년 출범한 기술투자기금 '비전펀드'가 밑천이 됐다. 차량·공간공유·자율주행·반도체·전자상거래·통신·IoT·로봇 등 투자 분야는 달랐지만, 모두 미래 인공지능(AI) 사회 구축을 위한 플랫폼이라는 공통분모로 수렴한다.
손 회장은 지난주 2분기(7~9월) 실적을 발표한 뒤 "너덜너덜한 실적을 내 참담하다"며 실수를 인정했다. 소프트뱅크는 사무실공유업체 위워크, 차량공유업체 우버 등 투자한 회사들의 부진 탓에 역대 최대 규모의 분기 손실을 냈다. 시장에서는 "손정의도 한물 갔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손 회장은 69살 은퇴 계획마저 번복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아직도 펀드를 만들어 AI 혁명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고 했다. ARM을 인수할 때와 같은 빅픽처가 눈에 들어온 건지, 한물 간 손 회장이 만용에 빠진 건지 두고 볼 일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인 스기모토 다카시는 지난해 낸(한국어판)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이라는 책에서 '손정의에게 크레이지 맨(미친 사람)은 최고의 찬사"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손 회장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전 결코 세상을 바꿀 대단한 발명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나은 특별한 능력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패러다임 시프트의 방향성과 그 시기를 읽는 능력입니다. 눈앞의 2~3년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10년 후나 20년 후에 꽃피울 사업을 씨앗단계에서 구별해내는 능력이 제게는 있습니다. 또한 그에 대한 리스크를 감수할 능력도 다른 사람보다 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