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 '공포' 대신 '탐욕'...침체 경고등 끌까, 말까
2019-11-11 06:20
미·중 무역협상 진전, 경기낙관론에 안전자산 대신 위험자산 부상
글로벌 금융시장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깜빡이고 있는 경기침체 경고등을 꺼야 할지, 두고 봐야 할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공포' 대신 '탐욕'...글로벌 증시, 1%만 더 오르면 '신고점'
세계적인 경기낙관론이 위험자산 수요를 자극하면서 세계 증시의 랠리가 한창이다. 주요 선진국과 신흥국 증시를 반영하는 MSCI전세계지수(ACWI)는 지난 8일 543.24를 기록했다. 11월 들어 상승세가 돋보였다. 1.3%만 더 오르면 2018년 1월 기록한 사상 최고치(550.32)에 도달한다.
주요국 증시는 이미 랠리 속에 역대 고점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미국 뉴욕증시에서는 다우, S&P500, 나스닥 등 3대 지수가 지난달 말부터 사상 최고치 경신 경쟁이 한창이고, 브라질과 대만 등 신흥국 증시도 최근 사상 최고치 또는 수십년 만에 최고치 기록을 새로 썼다. 일본 도쿄증시 간판인 닛케이225지수는 지난해 기록한 27년 만의 최고치에 바짝 다가섰다.
원유와 구리 같은 원자재시장도 최근 안정세로 접어들며 상승곡선에 올라 탔다.
위험자산에 돈이 몰리는 건 시장의 불안감이 누그러졌다는 방증이다. 월가에서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의 변동성지수(VIX)는 지난 8일 12.07에 불과했다. 하루에만 5% 넘게 떨어졌다. 10~20에서 움직이는 게 보통인 지수는 10월 초만 해도 20을 웃돌았다. 시장에 공포가 만연했다는 뜻이다. 연초에는 25를 웃돌았고 8월에는 한때 25에 육박했다.
CNN비즈니스가 내는 공포·탐욕지수는 시장의 공포가 탐욕으로 돌변했음을 보여준다. 0(극단적 공포)과 100(극단적 탐욕) 사이에서 움직이는 지수는 8일 91을 나타냈다. 1개월 전만 해도 30으로 공포가 시장을 장악했다.
분위기가 돌변하면서 안전자산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투자자들은 특히 채권시장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경기불안 속에 투자자들은 한동안 주요국 국채 투자에 열을 올렸다. 통화부양에 나선 중앙은행들의 초저금리 기조와 맞물린 안전자산 수요가 한동안 국채 가격을 띄워올렸다. 국채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 금리는 곤두박질쳤다. '마이너스 금리'가 흔해졌을 정도다. 최근 상황이 반전되면서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1.94%까지 반등했다. 이달 들어서만 0.25%포인트 올랐다.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일부 나라에서는 마이너스였던 국채 금리가 플러스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 세계 마이너스 금리 채권 규모는 지난 8월 17조 달러에서 최근 12조5000억 달러 수준으로 줄었다.
금, 은을 비롯한 귀금속, 엔화 등 다른 안전자산 가격도 최근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8일까지 일주일간 금 선물 가격은 3.7% 떨어졌다. 주간 기준으로 2016년 11월 이후 낙폭이 가장 컸다. 은 선물은 같은 기간 7.6% 하락했다. 블룸버그는 세계 경제 안정화 신호가 금의 투자 매력을 떨어뜨렸다며, JP모건과 시티그룹 등이 금에 대한 베팅을 청산했다고 전했다.
미국 경제전문방송 CNBC는 지난 7일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한때 0.15%포인트 뛴 1.97%에 도달한 것을 두고 "채권시장이 공식적으로 경기침체 경보기를 끄고 성장세가 더 강해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중 무역협상 진전 기대감이 경기 낙관론의 배경이 됐다. 중국 상무부가 미국과 단계적인 관세 철회에 합의했다고 밝힌 게 결정적이었다. 미국 측이 이를 부인하면서 비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미국과 중국이 지난달 고위급 협상에서 잠정 도출한 '1단계 합의'가 양국의 무역갈등을 완화하는 중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여전하다. 시장에서는 적어도 다음달 15일에 예고된 추가 관세폭탄은 터지지 않을 것으로 점치고 있다. 12월 15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1단계 합의 서명을 비롯한 미·중 무역갈등 변수의 중대 시한 또는 분수령이 되는 셈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경기침체 위험이 한풀 꺾였다는 게 중론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정례 이코노미스트 설문조사에서 미국 경제가 1년 안에 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지난 9월 34.79%에서 10월 34.19%, 11월에는 30.19%로 떨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월가 기관투자가들이 지난 8월만 해도 미국의 1년 내 침체 가능성을 50% 정도로 봤지만 이제는 골드만삭스가 24%, 모건스탠리는 20%가량, 심지어 바클레이스는 10%도 안 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WP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휴전을 논의하고 고용, 소비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경제지표가 강력하진 않지만 여전히 탄탄하다는 사실이 경기 낙관론을 뒷받침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진단도 다를 바 없다. 연준은 지난달 말 올해 세 번째 금리인하를 단행하며 이른바 '보험성 금리인하(insurance cut)' 행진에 사실상 '쉼표'를 찍었다. 경기부양을 위한 금리인하 사이클을 완전히 멈춰 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경기여건이 전보다 나아졌다고 본 것이다. 메리 데일리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 톰 바킨 리치몬드 연은 총재 등 연준 주요 인사들도 침체가 임박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시장에서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지속되면 머니마켓펀드(MMF)에 몰렸던 부동자금이 주식을 비롯한 위험자산으로 대거 유입될 것으로 기대한다. 금융정보업체 리퍼에 따르면 불안감에 휩싸인 투자자들이 MMF에 묻어둔 현금은 10년 만에 최대인 3조400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3년 동안에만 1조 달러가량 늘었다.
물론 과도한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장 꺼림칙한 변수는 역시 미·중 무역갈등이다. 금융시장에서는 여전히 미·중 무역전쟁을 가장 심각한 리스크(위험)로 꼽는다. 협상 분위기가 전보다 좋아진 건 틀림없어 보이지만, 아직 확실한 게 없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일 미국은 아직 중국과 합의를 하지 않았으며 모든 관세를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중국과의 협상은 매우 잘 되고 있고, 많은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비관론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에도 합의 직전에 협상을 백지화한 적이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미국이 12월 15일에 예고한 대중 추가 관세 조치를 강행하면 전보다 파장이 클 것이라고 우려한다. 중국산 소비재가 집중 표적이기 때문이다. 기업실적과 소비지표 악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은 미국이 어떻게든 추가 관세를 피하려 할 것이라는 관측을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