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 스페셜 칼럼] 휴전선도 ...베를린 장벽처럼?

2019-11-07 18:01
우연 아닌 필연이었다, 분단의 벽 무너진 까닭은

[김영윤 대표]




1989년 11월 9일. 30년 전 오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장벽이 붕괴되던 날 갑자기 뉴스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실감할 수 없었다. 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내가 살았던 브레멘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다. 학위를 마치고 잠시 몸담았던 독일회사의 동료들과 함께 갔다. 그들이 분단의 나라에서 온 나에게 묻는다. 장벽의 붕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얼떨결에 “난 너희들이 부럽다”고 했다. 그 부러움은 아직까지도 계속된다. 독일에서 돌아와 “통일연구원”이라는 곳에서 내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처음 연구원을 들어갔을 당시나 지금이나 남북관계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독일이 분단되었을 당시에도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동베를린이나 동독지역을 갈 수 있었으니까, 그런 것과 비교하면 진전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독일 통일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독일은 동독이 갑자기 붕괴되어 통일되었다”고. 그래서 “남북한의 경우에도 통일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준비를 해야” 한단다. 정말 그럴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거의 모두는 북한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다가올 우리의 미래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이 어떻게 붕괴될 것 같은지, 왜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

독일의 통일은 동독의 붕괴가 아닌 동독이 원해서 한 것이다. 동독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에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독일 통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흔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리고 너무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많은 사람들은 독일 통일을 ‘우연의 산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뒤엔 필연이 자리 잡고 있다.

동서독 통일에 결정적인 인물이 있다.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바로 그다.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에 대한 개혁과 개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페레스토로이카', '글라스노스트라'는 동유럽 국가의 개혁과 개방을 상징했던 단어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 나라의 장래와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동유럽 주민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또한 동독의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로부터 촛불행진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서로 이야기하며 행진을 했다. 이 행진이 동독 전 지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한때 동베를린에는 백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하기도 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여행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다. 동유럽 국가가 아닌 “서독과 서유럽 국가로도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 민중”이라고 외쳤다. 자유여행에 대한 동독주민의 요구가 최고조로 높아지자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국제기자회견을 한다. 동독의 선전상인 귄터 샤포스키가 나와 국외 여행 제한을 풀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여행제한의 해제가 언제부터 유효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지금 당장인 것 같다고 했다. 기자회견을 듣고 있던 동독주민들이 바로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내달렸다.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사람들을 동독의 국경수비대나 경찰들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왔다가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장벽이 무너져 서독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동독주민들은 통일을 외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한민족이다”라는 피켓을 들었다. 통일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독은 통일 10개항을 기반으로 하는 조약공동체를 만들어 천천히 통일할 것을 생각했다. 동독주민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서독의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고 했다. 서독정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채 8개월이 지나지 않아 서독의 마르크를 동서독이 같이 사용하는 화폐통합을 단행했다. 그 뒤 4개월 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지역 전체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고 총리를 선출한다. 독일의 정치적 통일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화폐통합부터 한 것은 동독주민을 동독지역에 머무르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독의 화폐를 서독의 화폐와 1:1로 바꿔 줄테니 동독지역에 머물러 달라는 조치였다.

동독주민들은 왜 서독과 즉각적인 통일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통일을 하면 서독처럼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분단 이후 부단하게 이루어진 양독간의 길고 긴밀한 교류·협력 때문이었다. 서독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얻었던 친서독적인 경험이 통일을 하면 서독과 같이 자유롭고 잘살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사코 서독과 통일하려고 했다. 그것도 동독이 서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통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평화통일. 이것이 동독주민이 시민혁명을 통해 쟁취한 통일의 실체다. 교류와 협력은 실로 다양했다. 일반인과 학생들의 상호방문이 이루어졌고, 도시간 자매결연이 이루어졌다. 각종 종교대회와 스포츠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동독지역에 건설된 교통 인프라는 동서독주민이 같이 사용했다. 심지어 65세가 넘는 동독주민들은 얼마든지 서독으로 올 수 있었다. 이산가족의 상봉은 물론이고, 동독의 정치범들도 서독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데려오기까지 했다. 동독주민들은 TV를 통해 서독을 잘 알 수 있었다. 서독 TV 광고를 보면서 잘사는 서독을 실감했고,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민주화된 서독 사회를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교류협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기에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동독주민들은 한결같이 서독과 통일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교류협력이 서독을 마음속에 동경하며 살게 했다. 서독은 통일을 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 다만 교류협력을 꾸준히 한 것밖에 없었다. 이것이 동독주민의 뇌리에 서독을 자연스럽게 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교류협력이 가져다 준 선물이 ‘통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통일은 어떤 형태인가. 우리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동서독이 바로 이런 통일을 했다. 이보다 더 좋은 사례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의 통일도 바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야한다. 통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동서독의 통일이 동독의 붕괴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이라고 한다면 그 붕괴를 동독 주민 스스로가 원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통일에 어떤 우연이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