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혹시 '건지 북클럽' 회원인가요

2019-10-24 10:45


<책에서 책으로 22. 매리 앤 새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책은 귀소본능으로 자기 독자를 찾아간다”

 

[건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책에서 책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재미있고 유익하며 아름답고 훈훈하다가 애처롭게 끝난다. 그런 안타까운 결말 때문에 책을 덮을 때, 다른 결말은 없었을까, 결말 없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을까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최근 몇 달 나라를 뒤덮은 너저분한 사건으로 영혼이 몹시 거칠어지고 지친 분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늦가을로 가는 길목이 아닌가. 오후 일찍부터 그림자 길게 늘어지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사귀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계절이 코앞이 아닌가.

영불해협 채널군도에 있는 작은 섬 건지(Guernsey, 면적 78㎢, 인구 6만3000명)는 영국보다는 프랑스가 훨씬 가까우나 영국 왕실령이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이 이 섬을 점령, 지배했다. 소설의 중심 줄거리는 그때가 배경이다.

“독일군의 몰수를 피해 몰래 키우던 마지막 돼지를 잡아 나눠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건지 주민 몇 명(대부분 농민이다)이 통금에 걸렸다. 독일군이 사실을 알면 모두 잡혀 가게 될 상황에서 작지만 지혜롭고 용감한 엘리자베스가 나선다. 그는 독일군에게 ‘독서클럽에서 책을 읽고 나오는 중’이라고 말해 위기를 벗어난다. 이후 이들은 정말 독서클럽을 만들어 서로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는다.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 등 로마 고전과 초서, 칼라일, 브론테 자매, 셰익스피어, 디킨스, 릴케의 문학작품들이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감자껍질로 만든, 맛도 영양도 없는 파이를 나눠 먹는 건 먹을 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클럽을 만든 엘리자베스는 회원은 물론 건지 섬의 이웃이 독일군에 의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맞선다. 그러다가 체포돼 유럽 먼 곳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는 거기서도 독일군의 무자비한 처사에 몸을 던져 항의하다가 처형된다. 사생아 딸을 남겨 놓고.”

이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1946년 북클럽의 주요 멤버인 도시 애덤스가 생면부지인 신예 작가 줄리엣 애슈턴에게 런던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알려지게 된다. 재치 넘치는 글로 막 뜨고 있던 줄리엣에게 도시는 “내가 갖고 있는 찰스 램의 수필집에 당신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 걸 보고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램을 좋아하는데 이곳 건지에는 독일군은 떠났지만 남아 있는 서점이 없어서, 런던에 있는 서점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면 램의 책을 우편으로 주문하려고 합니다”라고 적은 후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도시의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편지에 줄리엣은 친절하고 따뜻한 답장을 보낸다. “램의 책과 헤어진 건 참으로 슬프고 아픈 일이었어요. 물론 같은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고 책꽂이에 둘 공간도 없었지만, 그 책을 팔 때는 마치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죠.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군요”라고 쓴 줄리엣은 이어 “제 책이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라고 적는다.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라는,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밑줄을 쳤을 이 아름다운 구절 뒤에는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지요.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라는 또 다른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구절이 이어진다.
어떤 문학교수가 이 책을 소개하면서 ‘책연(冊緣, 책이 맺어준 인연)’의 귀하고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라고 쓴 걸 보았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일 것이다. 도시와 편지를 주고받은 줄리엣은 북클럽을 소재로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되고, 건지에 갔다가 도시와 사랑에 빠져 그곳에 머물게 된다. 찰스 램의 수필집이 맺어준 인연인 것이다. 참,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편지로 이어진다. 작가에 의한 인물과 장소 묘사는 한 줄도 없다. 이런 독특한 형식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미국인 매리 앤 새퍼가 썼다. 이야기 솜씨, 글 솜씨를 인정받았지만 제대로 된 책을 내보지는 못했던 그는 마흔여섯이던 1980년 우연히 건지 섬에 들렀다. 독일군 점령 시절이 기록된 건지 역사책 몇 권을 접한 그는 그때부터 이 이야기를 속에 품고 있다가 거의 30년이 지난 2008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마지막 윤문과 퇴고는 조카 애니 베로스가 맡았다. 출간된 바로 그해, 그는 자기 필생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책이 나온 지 10년 뒤인 2018년엔 영화(넷플릭스)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줄거리가 재미있고, 줄리엣을 연기한 주연 여배우도 예뻤지만 그림 같고 꿈 같은 건지 섬의 풍광이 아름답고 넉넉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영화는 많은 장면을 건지가 아니라 영국 남서쪽 데본 해안에서 찍었다. 데본은 런던에서 가기 쉬울 뿐 아니라 어디서 보아도 실망하지 않을 아름다운 경치로 소문난 곳이다.)

나는 프랑스 ‘국민작가’인 빅토르 위고를 통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왕정복고에 맞서다가 프랑스 땅이 보이는 건지로 망명했다. 여기에 15년을 머물면서 <레미제라블>, <웃는 남자>, <바다의 일꾼> 등 대작을 완성했다. 위고 덕분에 건지를 알게 된 나는 도서관에서 건지라는 이름이 제목에 들어 있는 게 반가워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책들은 저마다 귀소본능이 있는 모양이에요”라는 줄리엣의 목소리에 사로잡혔다.

책을 안 읽는 나라라지만, 한국에도 독서클럽이 많다. 친한 사람들끼리 조직한 클럽도 있고 자치단체나 도서관, 대학에서 운영하는 곳도 많다. 어린이만 상대하는 곳, 영어책만 읽는 곳도 있다. 나는 이 많은 독서클럽 가운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읽지 않은 곳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귀소본능을 가진 책이 제일 먼저 거기 아니면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