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文대통령, 이젠 아베와 담판할 때 됐다

2019-09-05 18:11

 

[조진구 교수]


정부는 지난달 22일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종료 결정을 발표했다. 일본이 전략물자수출 우대 대상국인 ‘그룹A(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대응조치이다. 일본이 한·일 간의 기본적인 신뢰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더욱 민감한 군사기밀을 다루는 협정을 유지할 명분도 없고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정부는 설명하고 있다. 

안전보장, 경제발전, 복리후생, 지위와 위신 등 국가가 추구하는 다양한 정책목표 가운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는 국가가 처한 상황이나 지도자의 인식에 따라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일본 정부를 향해 “어떻게 변명을 하든 과거사를 경제 문제와 연계한 것이 분명하다”며 “대단히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과거의 잘못을 인정도 반성도 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정부의 자세가 피해자의 상처를 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강제동원피해 관련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서 우리의 외교적 노력을 ‘거부’했던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자존심’을 훼손하는 처사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 발 뒤로 물러나 한·일 간의 쟁점 현안들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양국 정부는 상대방 입장을 겸허하게 검토하기보다는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자국 국민에게 설파하는 데 주력해 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로 인한 양국 국민감정의 악화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지 모르지만, 더 이상 양국이 소모적인 비난과  응수라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 주장의 내용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지난 8월 말 도쿄에서 자민당 의원을 비롯하여 언론인과 학자 등 10여명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 현재의 한·일관계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아베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포함하여 문재인 정권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2018년 한국정부의 노력에 의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개최되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 것은 높이 평가했지만, 북한의 비핵화 의지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주 비관적이었다.
둘째, 아베 총리는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한국이란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었다. 그 뒤에는 문재인 정부가 전 정권 때 이뤄진 2015년 12월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고 한·일청구권협정의 분쟁해결절차에 따른 일본정부의 외교적 협의와 중재위원회 설치 요청에 대해 한국 측이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남북 간의 협력과 통일을 최우선시하는 문재인 정부는 한·미·일의 안보협력체제나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보고 있다. 반면, 일본도 지정학적 측면에서 동맹국인 미국과 미국적 질서에 도전하는 중국에 관심이 집중돼 한국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넷째, 일본기업에 대해 위자료 배상 판결을 내렸던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며, 따라서 강제동원피해에 대한 배상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는 일본 정부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다섯째, 일본정부의 수출규제 강화조치에 대해서는 자민당 의원을 제외하면 거의 부정적이었지만, 한국의 수출관리체계 자체에 대한 불신감도 강했다. 다만, 한국과 관련한 수출관리상의 ‘부적절한 사안’이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인정하는 예외, 즉 일본의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이익’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관해 일본 정부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우리의 인식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으며, 한·일관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한·일 양국을 둘러싼 국내외 환경 변화에 맞춰 새로운 한·일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65년 체제’의 불완전성을 극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사회 내 보수 세력을 설득할 수 있는 아베 총리와의 정치적 합의가 불가결하다.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양국 사법부의 공통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소송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견해가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은 우리 정부 주도의 피해자 구제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착목할 필요가 있다. 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피해에 대한 배상이 해결되었다는 일본 측 입장과,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열린 자세로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겠다는 우리 측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양국 정상에게 부여된 책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