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예지에게 남은 '암전'의 흔적
2019-08-21 15:57
배우 서예지에게 영화 '암전'(감독 김진원)은 애증, 그 자체였다.
신인 감독이 상영 금지된 공포 영화의 실체를 찾아가며 마주하는 기이한 사건을 그린 이 영화는 주연배우인 서예지에게 벅찬 순간과 저릿한 감각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뜨겁게 몰두하고 온 힘을 쏟은 작품은 들출 때마다 당시의 고통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힘들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암전'은 서예지를 감정의 끝까지 데려간 유일무이한 작품이었다.
주연배우로서 묵직하게 '암전'을 끌고 나가야 했던 서예지는 광기에 사로잡힌 신인 감독 미정 역을 맡았다. "영화를 보기만 해도 몸이 아플 지경"이라는 그는 작품과 미정 그리고 김진원 감독에 관해 솔직히 터놓으며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해줬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서예지의 일문일답
영화를 보니 '고생했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 저 역시도 그랬다. 너무 고생한 걸 봤더니 온몸이 다 아프더라. 그래도 고생한 것만큼 아깝지 않게 잘 나온 거 같다. 고생한 장면들이 편집되면 아쉬우니까.
김진원 감독과 첫 만남은 어땠나?
서예지의 마음을 잡은 건 무엇이었나?
- 감독님이 작품과 미정 캐릭터에 관해 아주 명확하게 답변해주었다. 오래 고민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것에도 헷갈리지 않고 잘 잡아가는 모습에 '감독님과 함게라면 미정이 흔들리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김진원 감독의 전작들은 챙겨 보았나? 단편 영화들이나 전작 '도살자'를 보면 워낙 색채가 강한데, 전작들이 작품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궁금하다
- 전작들을 봤다. 전작을 보면서 '미정이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데' 생각했지. 하하하. '암전'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 본다. 광기를 테마로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데 '도살자'보다 심리적 압박, 공포가 강해서 좋았다. (작품에 접근하는데) 두려움도 없었고.
김진원 감독과 호흡은 어땠나
- 사람들이 감독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저는 공포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그런가. 감독님의 말이 다 알겠더라. 속으로 '왜 이해를 못하지' 싶을 때도 많았다. 다만 저도 이해가 안 갈 때는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했다. '제가 이해 안 가면 관객도 안 갈 거예요'라면서. 그러니 감독님께서 말하더라. '예지 씨 저와 친한 사람들도 저를 이해 못 합니다' 하하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해가 가더라. 텍스트만 두고 보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작품이나 캐릭터 그리고 감독님에 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정 캐릭터에 관해서도 궁금하다. 스타일링이 독특했는데
- 감독님께서 회색 머리를 제안하셨다. 탈색을 10번 정도 해야 하더라. 머리카락이 다 녹을 정도로 상해있었다. 헤어 외에 주근깨나 다크서클도 제안하셨는데 미정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던 거 같다. 새로운 얼굴을 부각하고자 했다고.
안경도 감독님의 제안이었나?
- 그건 저의 제안이었다. 제가 실제로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는데 실제적인 감정을 부여하고 싶어서 제 눈에 꼭 맞는 거로 착용했다. 안경테는 감독님이 골랐고 렌즈는 제 시력과 딱 맞다.
감독님이 헤어스타일링과 주근깨 등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 독특한 미정이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열망으로 가득한 모습을.
달라진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땠나
- 거울을 보고 너무 놀랐다. 다 내려놓고 얼굴에 관한 욕심은 안 나더라.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가자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정에 관해 완벽하게 몰두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거 같다. 왜 미정은 메소드 연기로 접근해야 했나?
- 신선하지 않나. 공포 영화인데 공포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감독 역할이라니. 비틀린 열망을 가진 인물이고 대사보다 행동이나 눈빛으로 감정 전달을 하는데 생각만으로는 진짜 감정을 가져갈 수 없었다. 특히 폐 극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신은 광기가 끓어오르는 모습을 담아야 하므로 완벽하게 몰두하고자 했다.
극 중 음주 신도 많이 나오는데, 소품이 아닌 실제 술이었다고
- 몰입감을 위해서였다. 귀신을 목격한 미정이 점점 미쳐가야 하는데 뭐든 '척'은 못하겠더라. 또 미정이 유난히 클로즈업 신이 많은데 그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관객들도 몰입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귀신 목소리도 서예지의 몫이었다고. 사실상 1인 2역인 셈이다
- 아무 생각 없이 연기하려고 했다. 만들어진 목소리를 낼까 봐.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를 내고 싶었다. 머리에 순미를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를 만들까 봐 정말 머리를 비우고 연기했다. 귀신이 내는 소리도 뜻 없는 말이다. 대본도 없이 2시간 정도 주절거린 거 같다.
공포 영화의 현장은 어땠나
- 너무 행복했다. '공포 영화 현장인데 왜 이렇게 즐겁지' 싶을 정도였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 진선규 선배와 함께 있으면 너무 재밌고 즐거운 거다. 서로 배려하고 잘 챙겨주니까. 스태프들과도 잘 맞고 정말 좋았다. 제가 만난 스태프 중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감독님은 감독님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현장은 내내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암전'을 통해 연기적으로 변화한 부분이 있다면?
- 그런 건 없었다. 캐릭터마다 상황마다 달라서 다른 연기를 하는 거지. 작품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성장하는 거 같다. '암전'은 '암전' 캐릭터만 생각했다.
그렇다면 '암전'을 찍을 때 당시의 고민과 연기적 변화는 무엇이었나
- 체력적인 부분이었다. 30대가 되니 체력이 달리더라. 20대는 열정으로 뭐든 해냈다면 30대는 '잠깐만 쉴게요' 하게 됐다. 제가 소망하는 건 무조건 건강이다. 지금도 체력적으로 힘든데 나이가 찬 다음 이 작품을 만났으면 더 힘들었을 거 같다.
현재 서예지를 자극하는 건 무엇인가
- 쉬는 시간 없이 일하는 것. 지금은 뭘 했다기보다 흘러가는 대로 저를 맡기는 거 같다. 데뷔 때부터 20대 초반까지는 자극을 받았지만, 지금은 '현재'에 충실히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