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신채호 며느리 "일본보다 친일파가 더 문제"...'일침'
2019-08-15 11:31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아베에 사죄' 주옥순에게 "한국쌀 먹고 어떻게"...비판
'독립유공자 대우 소홀' 지적…"친일파 땅은 찾아주면서 독립운동가 땅 찾아줬냐"
'독립유공자 대우 소홀' 지적…"친일파 땅은 찾아주면서 독립운동가 땅 찾아줬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76)가 "우리나라 친일파가 더 문제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게 오늘까지 이어졌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여사는 광복절인 15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반일 종족주의' 대표 저자로 논란이 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사죄한다"고 언급한 주옥순 엄마부대봉사단 대표를 언급하면서 "일본놈보다 더 심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어 "한국 땅에서 나오는 쌀알을 먹고 살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하나"라면서 "내가 나이를 먹어 그렇지, 60살만 됐어도 가만 안 둔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신수범 선생은 단재가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던 시절 태어났다. 남편은 돌쯤이던 1922년 어머니인 박자혜 선생과 한국으로 돌아와 이후 쭉 한국에서 살았다.
이 여사는 시아버지 단재가 베이징에서 따로 살다가 1936년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단재는 독립운동 참여 중 체포돼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하다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남편은 '남들이 아버지를 냉정한 분으로 알겠지만 따뜻하고 자애로운 분'이라고 기억했다"면서 "남편이 8살 때쯤 어머니와 한 달간 중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와 살았는데 한 달 내내 아버지 무릎을 베고 잤다며 그 기억이 너무 또렷하게 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뒀던 시어머니 박자혜 선생이 산파 일을 하며 사실상 가족 생계를 책임졌다고 했다. 당신 역시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해 활동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열성이었다.
이 여사는 "시어머니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대단하셨던 분"이라며 "남편은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인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13살이 돼서야 어머니께 물어봤다. 어머니가 싸릿대로 한참 때린 뒤 '오늘 이후 아버지 이름을 입에 올리면 혓바닥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받은 후에야 아버지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여사는 또한 독립유공자 대우를 소홀히 하는 국가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이 여사는 "현충원에 가보면 17만명이나 되는 무후(無後·자손이 없음) 유공자들이 있다"며 "그분들은 실제로 자손이 없어서 그렇기보다는 호적·국적이 없기 때문에 자손과 연결고리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단재도 무국적이었지만 2009년에서야 국적을 회복한 바 있다. 1912년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개편했고, 이에 단재는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광복 후 정부가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만 국적을 부여하면서 단재는 무국적자가 됐다고 전해졌다.
이 여사는 이런 탓에 자신도 투쟁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역설했다.
이 여사는 "아버님 국적 회복 운동을 19년간 했다"며 "바로 선 나라였으면 해방된 후 순국선열의 국적을 바로 회복해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그의 투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 여사는 최근 단재의 옛 집터인 삼청동 일대 소유권을 반환해달라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곳 삼청동 집터는 단재가 베이징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산 곳으로 추정된다. 1912년 국유지로 기록됐다가 단재가 순국하고 2년이 지난 1939년 한 일본인 앞으로 소유권 보존 등기가 이뤄졌다. 이후 소유권이 몇 차례 바뀌었다. 현재는 선학원이 소유 중이다.
이와 관련, 이 여사는 "국유지였던 땅이 일본인이 소유권으로 됐을 때 제대로 된 절차나 증거가 없다"며 "대한민국이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국가가 이완용 등 친일파 땅은 찾아주면서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분들의 땅 한 평은 찾아줘 봤느냐"며 "이번에 내가 투쟁의 선봉에 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