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이사회서 격돌한 한·일...공방 가열

2019-07-10 15:15
韓 "무역 규칙 위반" vs 日 "수출규제 철회없어"

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한국 측이 일본 정부를 향해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일본의 반도체 재료 수출규제가 WTO 무역 규칙에 위배되는 만큼 정치적 목적이 담긴 경제 보복을 신속하게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이번 조치가 WTO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철회 가능성을 일축했다.

일본 정부가 WTO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근거는 '안보'다. 안보상 위험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에는 예외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출 규제 대상으로 꼽은 품목들의 군사적 전용이 가능한 상황에서 한국 측이 무역 관리에 부적절한 모습을 보인 만큼 이번 조치가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이하라 준이치 주제네바대표부 일본 대사는 이날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안보 우려에 따른 무역 관리 측면에서 (이번 조치는) WTO 규정상 문제가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는 WTO 규정을 위반하는 무역 금수 조치가 아닌 안보상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일본이 지목한 안보 위험 요소로는 북한 유출 등 대북 연계 가능성이 꼽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7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 측의 잘못으로 (무역 관련)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며 북한과의 연관성을 시사한 것이 불을 지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경제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북한 제재와의 연관성을 언급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와 안보 협력 관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 이유다.

NHK가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에서 수출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가 화학무기 등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무역관리 체계가 허술한 탓에 이들 재료가 사린가스 등 대량살상무기로 둔갑해 북한 등 타국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린가스는 1995년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살포사건으로 알려진 맹독성 신경가스 중 하나다. 유사 종교단체인 옴진리교가 사린가스를 살포해 13명이 사망하고 6300여명의 부상자를 낸 이후 사린가스는 일본 내 트라우마의 상징으로 통한다. 한반도 위기론이 고조될 때마다 아베 내각은 북한의 도발과 사린가스를 연계, 비판해왔다.

한국 정부가 WTO 제소까지 검토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기존 규제 방침을 고수하겠다고 밝히면서 양국 긴장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본 정부는 오히려 이전까지 한국에 적용했던 간소화된 절차를 원상복구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노가미 고타타로 일본 관방부 부(副)장관은 10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이번 조치는 안보 목적의 수출관리 제도를 적절하게 운용하기 위한 재검토"라며 이런 조치가 WTO 규범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일본이 가진 첨단기술의 무역관리를 위해 조사를 시행하는 전담부서를 지난 4월 신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 내 주요 경제국인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외신들도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백지아 주제네바대표부 한국 대사는 이번 이사회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진 경제 보복"이라며 "이번 조치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 산업에 악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통신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외신은 10일 보도를 통해 "한·일 간 기술냉전이 중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화웨이를 포함한 중국 기업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평가했다. 

부산대학교의 료 히나타-야마구치 초빙교수는 "중국은 한국·미국·일본 간 3자 회담이 세계의 동맹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경계해왔다"며 "경제적 손실 등을 감안할 때 한·일 양국 관계를 구제하기 위해 전략적이고 과감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한국 정부는 23∼24일 예정된 WTO 일반이사회에서도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의 부당성을 설명한다는 방침이다.

 

[그래픽=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