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통미봉남(通美封南)'④끝]북미채널은 김정은의 전리품? 권정근발언 속뜻 읽어보니…
2019-06-29 10:00
이런 이력을 거쳐서, 북미국장 권정근은 6월 다시 북미회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남한을 동시에 맹타하는 담화문을 내놓는다. 주 유엔 북한대표부에서 글로벌 여론과 싸우며 체계를 세웠을 방어논리를 바탕으로 ‘싸움닭’ 역할을 도맡아온 그다. ‘권정근의 공격’ 뒤에는, 잘 정리된 김정은의 뜻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번 담화문이, 시정연설에서 문대통령을 겨냥했던 ‘오지랖’의 시즌2라고 보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 "일희일비할 필요 없어, 한국은 북한 핵문제의 당사자다" 전문가들의 입장
전문가들은 담화문과 관련해 이런 해설들을 내놓고 있다. (헤럴드경제 기사에서 발췌 재인용)
”북한은 현재 미국에 공을 넘겨놓고 태도변화와 건설적인 해법을 강구해야 하는 시점으로 여기고 있다. 이 와중에 자신들의 협상카드 내용을 한국이 미리 말하고 있어서 쓸데 없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 연구실장)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북한 핵문제와 한반도 평화 구축에 있어서 우리는 중재자이자 촉진자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당사자이다. 정부는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문성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실장)
그의 말 속에는,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전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북미회담에 대한 김정은의 ‘빅 시나리오’가 숨어있다. 우선 북한이 미국에 내놓아야할 카드(예를 들면 문대통령이 영벽 핵시설 폐기를 언급한 것)를 남한이 선수치고 있는데 대한 불쾌감 때문에 이런 격한 담화문이 나왔다는 분석은 비교적 소박하고 즉흥적인 견해로 읽힌다. 담화문은 4가지의 음미할 만한 포인트를 지니고 있다.
# '권정근 담화문'에 담긴 김정은의 본심 4가지
첫째 미국에 대한 나름의 압박이다. ‘쌍방의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하라는 요구다. 이 말은 단계적인 비핵화와 단계적인 제재완화의 교환이란 입장을 재천명하는 것이며, 트럼프가 이 대목에서 유연한 제안을 연내에 제시해달라는 주문이다. ‘거듭되는 경고’는, 비핵화의 역방향인 핵무장으로 가는 선택을 뜻한다. 위의 말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북한은 더이상 물러서지 않으며, 핵 보유를 강화해 자신들만의 길을 가겠다는 ‘선’을 그어놓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것이 김정은의 생각이다. 하노이에서도 타협할 수 없었던 그 포인트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말이다.
둘째 남한의 북미대화 지원에 대한 명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남한 당국자들’이라고 했지만, 문재인정부 더 정확하게는 문대통령을 겨냥한다. ‘북미관계를 중재하는 듯이 여론화하면서 몸값을 올려보려’ 하는 것이나 ‘제 설 자리를 찾아보려고 북남 대화가 진행되는 듯한 여론을’ 만들고 있는 것이란 비판은, 중재자-촉진자 역할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그 의도가 남북평화라는 큰 비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뼈있는’ 말이다. 즉 북한 문제를 남한의 총선과 같은 정치에 활용하려고 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 있다. 문대통령의 평화의지를 불순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이 가차없는 관점은, 북한이 남북이 최근에 진전했다고 믿고 있는 평화무드를 얼마나 냉혹하게 읽어내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런 생각은, 지난번 연두교서에선 보이지 않았던 관점이다. 이 점을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셋째 북미대화의 북한 주도성 강조의 측면이다. 우리 정부는 결과론적으로 ‘한반도 평화로 가는 프로세스’로 북미정상회담을 인식해왔고, 이 회담에서 사실상 우리가 ‘당사자’라고 믿어왔다. 위의 문성문 실장의 말에도 그런 생각이 담겨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점을 상당히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당사자는 말 그대로 우리와 미국’이라고 밝히고 ‘북미 적대관계의 발생 근원으로 보아도 남한 당국이 참견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고 주장한 것이 그 대목이다. 북미 적대관계의 발생 근원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남한과 북한이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그 전쟁이, 실은 미국과 북한이 싸운 전쟁이었으며 그 적대의식을 해결하는 차원에서의 협상이라는 것이다.
대북제재와 핵무기에 대한 논의를 그 전쟁사의 연장으로 읽어내는 이 관점은, 남한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김정은의 복심(腹心)일 것이다. 북미대화는 2:1의 대화가 아니라 오직 북한과 미국간의 협상이라는 이 ‘포인트’는, 우리의 중재자/촉진자 자임(自任)이 저들에게 얼마나 어이없이 느껴지는 것인지를 되짚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들은 북미 직거래로 '자력(自力)'의 갱생을 원한다. 김정은의 니즈가 어디에 있는지, 이 대목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역할과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통미봉남은 그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 글로벌 입장의 기조이며, 일시적 변덕이나 남한에 대한 무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대통령의 태도가 유화적이고 포용적이라서 함부로 하는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넷째,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북미대화의 진전은 남북한의 평화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오직 김정은 위원장의 뛰어난 ‘영도력’이 이뤄낸 성취라고 북한은 믿고 있다. 3대에 걸친 지도자들 중에서 이같은 진전을 이뤄낸 경우는 초유의 일이기에 그 성취는 북한 사회 내부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이 된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북미관계는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와 미국대통령 사이의 친분관계에 기초해 나가고 있다’는 발언이, 그 점을 밝힌 것이다. 적대국가였지만 세계 최강의 국가로 군림하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과 ‘친분’을 갖추고 대등한 관계로 협상을 하는 지도자의 위상은, 김정은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을 남한이 거들어주겠다고 ‘힘’을 나누자 하니, 북측은 눈치없는 행위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북미회담은, 김정은의 ‘전리품’이다. 그걸 대놓고 건드리는 건 북한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남한내부의 정치적인 계산까지 읽고있다면, 그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의욕을 곱게만 보기는 힘들 수 있다. 남북 사이에 물밑대화나 교류가 있는 것처럼 ‘광고’하는 것이 못마땅한 이유도, 북미대화의 공로를 함부로 분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정근의 발언을 제대로 읽는 것은, 향후의 정부 역할 설정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3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은이 문재인대통령의 언행이나 과욕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회담이 지닌 상징성들을 훼손할 수 있기에 물러서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의 정신을 망각한 태도나, 혹은 남측 대통령을 조롱하고 남한의 이용가치가 사라졌음을 알려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 북미협상 목표는, 북한에겐 '평화'보다 '정상국가 밑천'마련이다
북미협상을,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위대한 구상을 실천하는 과정으로 읽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심각한 콩깍지일지도 모른다. 김정은 위원장은 다만, 자신들이 비축해온 핵무기를 ‘협상 무기’로 바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국가개혁의 밑천을 마련하겠다는 나름의 계산으로 제재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서서히 베팅 테이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들끓을 수 밖에 없다.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드는 게 그에겐 우선이다. 남쪽의 선심에 기대서 남북관계를 논의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더 '불안'할지도 모른다. 국력의 기울기는 남북평화 혹은 통일의 결과를 전혀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인들 왜 모르겠는가. 그 점을 먼저 인식의 기틀로 삼아야 남북관계가 정상적인 궤도로 향할 수 있다. 제2의 ‘오지랖 반격’으로 불릴 만한 권정근담화문에는, 뜻밖에 본질적인 물음이 숨어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