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핵사용 포기가 6.25 원인? 김일성 남침과 스탈린

2019-06-25 09:31

[6.25 전쟁 자료사진.[출처=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을까. 이미 뚜렷한 결론이 나 있는 질문이지만 해마다 6월 25일 즈음이 되면, 망각과 기억이 전쟁이라도 벌이듯 이 문제는 단골메뉴로 논란의 테이블에 오른다.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참전유공자와 유가족을 초청한 자리에서 6.25와 관련해 "북한의 침략을 이겨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켰다"고 발언함으로써 남침론을 분명히 한 것도 그 때문이다.  

6.25 남침론을 정통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일으켰으며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한 지역 전체를 잃을 뻔한 위기에서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휴전선을 고착시킨 전쟁이란 것이다. 문대통령이 이것을 굳이 밝힌 까닭은 그간 '운동권 기반 정부'라는 지적을 받아온 가운데, 한국전쟁에 대한 관점이 흔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일부의 의혹을 불식시키는 쐐기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운동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다른 해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수정주의적 관점이다. 즉 이 전쟁은 남쪽 내부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지의 분출이며, 김일성은 민중의 욕구를 수용하려는 차원에서 통일전쟁을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견해는 민주화 추진 세력으로 불려온 운동권의 핵심 논리로 자리를 잡아왔다. 같은 전쟁을 사이에 놓고 이처럼 갈라지는 해석은, 역사 이해와 이념 가치의 분단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정통주의적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국제적인 문서들과 증거들이 보완됨으로써,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1994년6월2일 러시아를 방문했던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대통령이 건넸던 검은 상자였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건네받았던 이 상자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상황을 담은 문서 복사본 300여종이 들어 있었다.

문서 속에는  1949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 사이에 오갔던 전문(電文)과 소련공산당 중앙위 회의록 등 극비자료가 수두룩했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우쩌둥으로부터 남침계획을 승인받은 내용과 남침 시기에 대해 협의한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1950년 5월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인들의 제청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고 중국이 북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또 5월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당시)를 만나 "소련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가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으며 6월까지 완전한 준비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라 말했다. 

1950년 9월28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북한군 자력으로는 38선 이북을 지킬 수 없습니다. 소련이나 중국군의 즉각 개입을 요청합니다." 이에 스탈린은 1951년 3월3일 북한에 소련군 2개 항공사단과 트럭 6000대를 보낸 것으로 문서는 증언하고 있다. 

2010년 7월 강준식(저널리스트)은 6.25를 둘러싼 기류와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밝혀낸, 방대한 양의 기고를 월간중앙에 싣는다. 이 글에는 '옐친 문서'에 담기지 않았던 긴박한 상황들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북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스탈린은 고개를 저었다.  미국이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에 불허한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문서 하나가 소련에 포착된다. 미국이 외국의 전쟁에 핵무기를 쓰지 않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스탈린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허락한다. 처음에 전쟁은 서해 일각을 ‘도발’함으로써 국지전으로 시작하려 했다. 전쟁의 책임 문제가 생길 때 얼버무릴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쟁의 효율성을 위해 전면전으로 바꿨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무슨 까닭인지 사흘 동안 더 이상의 진군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승리에 도취한 데다가, 작전을 신중하게 추진하려는 사령관의 판단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정은 오판이었고, 우리 군과 미군이 전세를 가다듬을 시간을 줬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북한이 초기 전쟁에서 실패한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후 낙동강까지 내려간 북한군이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교착에 빠지고 후퇴를 시작하면서 전쟁의 분위기는 역전된다.

서울을 탈환하고 삼팔선을 넘을 때 이승만은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결정했다고 말해왔으나,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미 그것을 허용한 발언이 문서로 나와 있다고 강준식은 밝히고 있다. 트루먼은 다만 중국과 소련의 국경까지는 올라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8선을 넘었을 때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 마오는 중국 변경 부근인 북한 영역까지 미군이 들어오는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무제한 지원에 나선다. 1.4 후퇴로 우리 군이 쫓겨내려왔고 38선 근처에서 처절한 공방전이 펼쳐진다. 이 무렵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 중국 본토를 치자는 의견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세계3차대전을 부르는 위험한 작전으로 이해되었다. 맥아더가 너무나 단호하고 거칠게 주장하는 바람에,(트루먼 대통령을 향해 '바보같은 자식'이라고 말해서 노여움을 샀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은 그를 사령관에서 해임한다.

미국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과 관련해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핵 보유를 요청한다. 하지만 스탈린은 같은 이념의 국가이긴 하지만 껄끄러운 이웃인 중국에게 핵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답보 상태에 빠진 전쟁에 양쪽이 지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휴전 의사를 타진하고 중국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휴전을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당시)이었다. 이대통령은 미국이 논의를 하자고 불렀으나 가지도 않았다. 이런 버티기로 그는 휴전에서 유리한 조건들을 얻어낸다. 이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한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을 한다.

공군장성 출신인 윤응렬선생은 스탈린이 한반도의 적화(赤化)를 노린 까닭을 설명한다. 원래 유럽 쪽을 공략해 공산주의 세력을 확산할 심산이었는데 그 시도가 좌절되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6.25를 조종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6.25의 성격에 이렇게 말한다.

 "이 전쟁은, 동족상잔이나 한반도 내전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공산화를 위한 기지 확대를 노리던 세력들이 일으킨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우리 군과 미군, 그리고 유엔군이 '세계' 혹은 '자유세계'를 지켜낸 값진 승리였습니다." 
 

[6.25전쟁 때 미국 사진기자(라이프지 전속기자)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이 촬영한 사진.]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