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쟁점으로 떠오른 고립의 땅...북아일랜드의 눈물

2019-03-14 16:52
브렉시트 합의안 '백스톱' 논란...'피의 역사' 되풀이 우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블러디 선데이'에는 800여년간 이어진 영국의 강제 통치를 청산하고 식민지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각각 1920년대와 1970대의 아일랜드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통일을 요구하는 반(半)군사 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태동과 유혈 사태가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약 2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 합의안을 거듭 거부하면서 북아일랜드가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간 국경을 두고 유럽연합(EU)과 영국 정부가 합의한 내용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방어하면서 브렉시트 불확실성이 높아진 탓이다. 

◆철조망도 검색대도 없는 500km...'백스톱'에 막히나

아일랜드 국경은 아일랜드섬의 위쪽 3분의 1 지점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다. 전체 길이는 499㎞에 달한다. 남쪽의 아일랜드공화국과 북쪽의 영국령 북아일랜드를 나누고 있지만 철조망이나 검색대는 없다. 커다란 비석이나 표지판이 도로 양측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국경을 지나는 약 270개의 도로 위를 아무런 제약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EU와 영국이 작년 도출한 브렉시트 합의안 초안은 △서문 △1부 통칙(8개 조항) △2부 시민의 권리(31개 조항) △3부 분리 대비(86개 조항) △4부 이행(7개 조항) △5부 금융 대비(25개 조항) △6부 기관 및 최종 대비(28개 조항) △의정서 △부록 △각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모두 585쪽에 달한다. 
 

[그래픽= 아주경제 김효곤 기자 hyogoncap@]


브렉시트 합의안에서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백스톱(안전장치)'은 '의정서' 부문에 담겼다. 하나의 섬에 두 개의 국가가 나뉘어 있는 아일랜드섬의 특성을 반영해 물리적인 국경을 되살릴 경우 생길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다. 백스톱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를 사실상 EU 단일시장 관세동맹에 남긴다는 의미가 있다. 

당초 EU는 북아일랜드만 EU 관세동맹에 남기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물리적인 국경을 만들면 혼란이 고조될 수 있으니 아일랜드섬 전체를 EU 단일시장에 남겨두자는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 두 경제권'에 따른 통제의 어려움을 들어 끝내 이를 거부했다. 반면 영국은 EU와의 무관세 무역을 전제로 북아일랜드 국경에 단순한 통행·통관 절차만 두는 방식을 제안했지만 EU 통관 절차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의견에 반려됐다.

영국과 EU가 마라톤 협상을 통해 도출해낸 것이 바로 현재의 백스톱이다. 영국이 EU를 떠나더라도 2020년 12월까지 전환기간으로 설정하되, 별도의 합의가 있을 때까지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전체가 당분간 EU 관세동맹에 남는다는 것이 골자다. 다만 양측은 언제까지 영국을 관세동맹에 남길지, 어떤 조건 아래 안전장치를 폐기할지 등은 구체적으로 합의하지 못했다. 영국 의회가 자국 권위 약화를 빌미로 현재의 합의안 반대를 초래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EU의 미니 헌법격인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르면 영국은 3월 29일 반드시 EU를 떠나야 한다. 국경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북아일랜드에서 경제·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지리적으로 영국 본토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아일랜드공화국과의 교류마저 단절되면 소외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BBC에 따르면 2018년 북아일랜드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성장률)은 0.9%로 2017년(1.7%)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벨파스트 평화협정 인정한다지만...'피의 역사' 되풀이 우려 

브렉시트 합의안의 의정서 서문에는 '아일랜드섬의 독특한 상황'을 다뤄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벨파스트 협정'은 모든 부분에서 보호돼야 한다는 점이 명시돼 있다. 벨파스트 협정(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은 지난 1998년 개신교계 영국과 가톨릭계 아일랜드 간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체결한 것이다. 아일랜드공화국이 북아일랜드의 영유권을 포기하는 대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자유로운 통행과 통관을 보장한다는 것이 골자다.
 

13일(현지시간) 공개된 영국령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 지역에 있는 A13번 도로. 북아일랜드 국경을 표시하는 표지판 옆으로 자동차가 지나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그러나 브렉시트로 인해 아일랜드 국경에서 통행·통관의 자유가 갑자기 통제되면 '피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벨파스트 협정으로 잠복해 있던 북아일랜드 내 신·구교도 간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72년 1월 영국군이 시위중인 구교도 시민들에 발포, 14명이 숨지는 유혈 사태가 빚어진 뒤 IRA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반정부 활동이 이어졌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사건으로 유혈 충돌이 반세기 가까이 이어졌으나 벨파스트 협정을 계기로 가까스로 봉합됐다. 북아일랜드가 영국령이 된 배경 중 하나는 당시 아일랜드계 구교도(가톨릭)보다 영국계 신교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약 30년간 잠복해 있던 아일랜드계 구교도들의 독립·요구가 브렉시트를 계기로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영국 경찰당국은 영국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테러 행위에 IRA가 연루됐는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16년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 이후 영국 지역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잇따라 일어난 데다 지난 1월 북아일랜드에서 폭탄 테러로 의심되는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IRA를 자처한 조직이 배후를 주장하면서부터다.

최근 영국 히스로 공항과 시티 공항, 워털루 기차역 등 주요 교통 허브에서 발견된 수상한 폭발물들을 배치한 배후도 IRA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이런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영국과 EU가 '안전장치'를 통해 부족하나마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자유로운 통행·통관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정한 것도 이런 우려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 합의안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EU는 더 이상의 추가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영국이 어떤 합의점도 마련하지 못한 채 EU를 떠나는, 이른바 '노 딜 브렉시트' 가능성이 높아진 이유다. 현재로서는 노딜 브렉시트가 영국을 넘어 세계에 어떤 충격파를 안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안전장치에 대한 해법을 도출하지 못하는 한 북아일랜드에서 표출될 갈등에 대한 우려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