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석규, '우상'에게서 '초록물고기'의 향기가 난다
2019-03-14 07:00
"과거 '초록물고기' 시나리오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극장에 관객이 오면 영화를 보기 전에 시나리오를 싹 돌렸으면 하고요.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 상영을 했으면 좋겠다고. 그 정도로 시나리오 완성도가 높았거든요. 그런데 '우상'도 그렇더군요. 시나리오를 덮고 나서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 이 작품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 몸을 통해서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우상'(감독 이수진)은 아들의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 남자 명회(한석규 분)와 목숨 같은 아들이 죽고 진실을 좇는 아버지 중식(설경구 분), 그리고 사건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 련화(천우희 분)까지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수진 감독의 전작이 '한공주'라고 하더라고요. 워낙 칭찬을 많이 들었던 터라 한껏 기대됐어요. 시나리오를 보기 전 영화를 봤는데 '아'하고 탄식만 질렀죠. 가슴이 답답해지더라고요. 영화의 주제나 메시지는 확실하고 명확하지만,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짐작이 돼서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 상상보다 더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이후에 시나리오를 들춰봤는데 그것도 어려웠어요. 한 문장, 한 문장이 아주 치밀해요! 평소 읽던 것보다 더 어려웠어요. 시간도 오래 걸렸죠."
"마찬가지였어요. 탄식만 나오더군요. 몸을 웅크리고 잔뜩 긴장한 채로 영화를 보다가 엔딩 크레딧이 나오자 '아···'하고 숨이 터져 나왔어요. 창작자 입장에서 이 영화가 '해야 할 이야기인가?'라면, 관객 입장에서는 '들어 볼 만한 이야기인가?'가 중요하잖아요? 저는 '우상'을 낫기 위해 먹어야 하는 '쓴 약'이라고 평가해요. 아주 쓰지만 먹어야만 하는 그런 약."
이번 작품에서 한석규는 차기 도지사 후보에 거론될 정도로 존경과 신망이 두터운 도의원 구명회 역을 맡았다. 모두의 '우상'이지만, '우상'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비겁하고 치졸한 인물이다. 한석규는 인물의 '비겁함'이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고 고백, 아주 오래전부터 이러한 역할을 기다려왔다고 덧붙였다.
연기 경력 28년 차인 베테랑 배우가 고백하는 '매너리즘'에 귀가 쫑긋했다. 1990년 KBS 성우로 입사해 이듬해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 드라마 '서울의 달' 영화 '초록 물고기' '넘버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텔미썸씽' 등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최고의 배우로 군림했던 그에게 '슬럼프'라니.
"젊었을 때는 제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한다고 여겼어요. 자신감도 있었고 연기자로서 맹렬히 다 해낼 것 같았죠. 그러다 마흔 살에 건강도 덜커덕 해버리고 자신감도 잃고요. 내가 연기를 왜 하나 그런 생각에도 빠지게 된 거 같아요. 연기라는 것이 하찮게 느껴지고 지치기도 했어요. 뭔가에 혹한 것이죠. 쉰이 되니 오히려 반대로 '아,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구나' 하면서 초심이 생각났어요."
16살, 윤복희가 출연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고 온몸에 전율을 느낀 뒤 연기자를 꿈꾸게 되었다는 한석규. 이후 "반응은 곧 삶"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다며 "연기 역시 마찬가지"라는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무언가를 보고 반응하는 것은 중요해요. 산다는 건 곧 반응하는 거고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곧 어떻게 사느냐인 거 같거든요. 연기도 그래요. 일종의 반응인 셈이죠. 예전에는 상대방의 연기는 보는 척, 듣는 척만 했는데 지금은 '정확히 보고, 듣고, 리액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걸 주문처럼 외우곤 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상'의 상대 배우인 설경구, 천우희는 어땠을까? 한석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두 배우를 칭찬, "후배지만 존경하는 배우들"이라고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먼저 명회의 아들 때문에 가족을 잃게 된 중식 역을 맡은 설경구를 두고 한석규는 "나이를 떠나 우리는 친구"라며 애정 어린 시선을 건네기도.
"저와 비슷한 사람이에요. 나이를 떠나서 우린 친구죠. 조선 시대 선비들은 나이가 어려도 자신보다 학문이 월등하면 친구로 지냈잖아요? 설경구도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연기를 잘하는 친구기 때문에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요. 하하하. 저는 작품에 몰입할 때 발광을 꽤 많이 하는데 그 친구도 그렇더군요. 누가 봐도 많은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조선족 여인 최련화 역을 맡은 천우희에 관해서도 애정 어린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극 중 조선족 캐릭터를 위해 사투리를 완벽히 익히고 눈썹을 미는 등 강렬한 이미지와 예리한 연기력으로 영화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데 성공한 그를 두고 "후배지만 존경한다"며 칭찬을 쏟아놓은 것이다.
"여자 연기자가 련화 역할을 본다면 어우, 살짝 두려울 거 같아요. 밑천이 다 드러나는 역할이잖아요. 내가 보기엔 (천)우희가 이수진 감독에게 코가 꿰인 거 같아. 하하하. 아니 어떻게 이렇게 힘든 역할에 선뜻 출연해줄 수 있어? 참 고맙기도 하고 과하게 표현한다면 존경스럽기까지 해요. 제가 15~20년 정도 먼저 했다뿐이지 정말 존경스러운 동료 배우죠."
'초록물고기' 이창동 감독을 비롯해 '넘버 쓰리'의 송능한, '접속' 장윤현, '프리즌' 나현 감독과 '우상' 이수진 감독에 이르기까지. 한석규는 당대 '신인 감독'과 함께 작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인 감독들은 모든 걸 쏟아부어요. 이수진 감독도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5㎏이 빠졌죠. 다 걸고 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정성을 다할 뿐이에요. 얼마 전에도 최민식 형님과도 그런 말을 주고받았어요. '우리는 농사꾼이다. 정성을 다해 쌀을 생산한다. 우리 몫은 딱 거기까지다'라고."
"딱 거기까지"가 배우의 몫이라고 했으나 한석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고, 새로운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의 한국영화 시장 역시 '새로운 흐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제가 한창 작품을 많이 했을 때 '뉴 코리안 시네마'를 열심히 떠들었어요. 영화 출발의 원동력은 새로운 한국영화예요. 그걸 꿈꿨고 열심히 했죠. 전 그걸 '맹렬하다'고 표현했어요. 자본, 투자, 제작자까지 모든 것이 급변하던 1990년대였죠. 제가 꿈꿨던 새로운 한국영화를 하기에 좋은 시기였고, 거기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았죠. 2000년대 들어서는 상장 열풍이 부는 등 또다시 환경이 바뀌었어요. 최근에 생각해보니 지금도 새로운 한국영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우상'은 새로운 한국영화고 제가 찾고자 한 것들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