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1-2]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바꿔라

2019-03-12 08:00
근세 세계 모든 문헌과 지도는 말한다. ‘만주는 한국땅’이라고

 

강효백 교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초 임시헌법의 ‘구한국(Old Korea)의 판도’가 최종 임시헌법 ‘대한(Great Korea)의 고유한 판도’로 해상도와 배율이 더욱 뚜렷해지고 확대된 배경과 취지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뇌부들의 국토인식이 한반도와 간도를 아우르는 ‘큰 한국, 대한(大韓)’일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다음 여덟 부문으로 요약해본다.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토는 삼천리 한반도뿐만 아니라 사천리 만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이어받은 것은 국호뿐만 아니다. 대한제국의 사천리 국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제2조 영토 ‘대한의 고유한 판도’가 바로 대한제국 원년(1897년)에 선포한 사천리 강토이다.

1)고종 34년(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일 익일: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2)고종 34년(1897년) 9월 30일 : 우리 영토의 넓이가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다스리는 나라 (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3) 고종 34年(1897년) 9월 29일: 육지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그래픽=강효백 교수 제공]


2.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시대 실학자 증언 : 만주는 우리 땅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3권, 「송한교리치응사연서(送韓校理致應使燕序)」에서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이라 한다(而國於遼河之東謂之東國”라며 요하 동쪽을 우리나라 강역으로 정의했다.

정약용이 1811년에 편찬한 역사지리서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1)*에서도 예맥과 말갈 발해의 강역을 상술하였으며 요동 지역은 수복해야 할 강역으로 보았다.

초기 실학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조선영토를 압록강 이북 지역까지 포함했다. 허목(許穆, 1596~1682)의 『동사(東史)』는 숙신과 말갈을 조선의 역사지리에 서술하였다. 이익(李瀷,1681~1764)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흥왕조승(興王肇乘)』과 『북새기략(北塞記略)」,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강계고(疆界考)』 등은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을 조선의 영토임을 명기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인문지리서 이중환(李重煥, 1691~1756)의 『택리지(擇里志)』는 고려 중기의 윤관(尹瓘, 1040~1111)이 동북 9성을 개척하면서 기념비를 공험진(公嶮鎭)곁에 있던 선춘령(先春嶺)아래에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했다.

3. 근세조선 대표지도, 만주는 우리 땅

18세기 대표적 지리학자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1750년대에 제작한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2)*는 만주와 조선을 아우르는 영토를 조선전도로 표기하고 있다. 『동국대지도』는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 이후 역대 조선 왕실에 의해 공인된 조선후기 대표지도다. 영조는 칠십년 평생 이런 지도를 본 일이 없다고 감탄을 하며 『동국대지도『를 홍문관(弘文館)에 보내 모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실록」 90권, 1757년 8월 6일(을축)). 같은 시기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에도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대한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중국 근세 거의 모든 대표 문헌, ‘조선영토 남북사천리’

중국의 명청(明淸, 1368~1910)시대를 대표하는 모든 총서 사서 지리지에는 조선 영토를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문헌을 12개만 골라 시대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1) ② 『수역주자록(殊域周咨录)』(1574) ③ 『함빈록(咸宾录)』1598, ④ 『황명경세문(皇明經世文)』 (1643) ⑤『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1658) ⑥『대청일통지(大清 一統志)』 1743, ⑦『사고전서(四庫全書) 조선부(朝鲜赋)』(1781) ⑨『사고전서 외사이관고총서(外四夷馆考总叙)』(1781) ⑩『사고전서 정계양잡저(鄭開陽雜著) 조선도설(朝鮮圖說)』(1781) ⑪ 『광여도전서(廣輿圖全書)』(1785) ⑫『동번기요(東藩纪要)』 (1882)

반면에 조선 영토를 한반도의 면적인 ‘3천리’로 표기된 명청시대 문헌은 단 1건도 없다.

참고로 중국의 1리(里)는 약 0.5km로 한국의 1리 약 0.4km보다 긴 거리다. 따라서 조선영토 남북 사천리는 약 2000km로 제주도 남단에서 러시아의 하바롭스크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거리다. 즉 만주 지역은 고조선시대나 고구려 발해시대는 물론 조선후기에도 우리 땅이었다.

5. 근세 중국과 일본의 거의 모든 지도: 만주는 한국 땅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1717년), <대청만년일통천하전도(大淸萬年一統天下全圖)>1767년,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圖)>(1865년),<대청23성여지전도부조선주도여지도(大淸二十參省輿地全圖附朝鮮州島輿地圖)>(1885~1895년) 등을 비롯 18~19세기 중국의 모든 지도는 만주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심지어 일본지도작성의 선구자인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1717~1801)가 1775년 제작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도 만주가 조선 영토로 표기돼 있다.
 

[사진제공=강효백 교수]


6. 400여점의 서양 고지도 : 만주는 한국땅

2007년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은 2005년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이 발표한 서양 고지도 69점을 포함한 서양 고지도 400여점을 분석한 결과, 모든 서양 고지도에 20세기 초까지 이들 남만주 지역은 모두 한국 영토로 표기됐다고 밝힌 바 있다.

7.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인의 영토관에는 만주는 없었음

유사 이래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漢族)의 가슴 속 영토에 만주는 없었다. 만주가 중국인의 영토의식 판도밖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해줄 수 있는 자료들이 반만년 중국사의 벌판에 수북하게 널려있다. 그 중 한가지만 예로 들겠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을 때 대부분의 세계열강들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일본 제국주의 야욕을 규탄하고 가능한 한 강경한 제재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국인 중국 정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이 일본과 밀약을 맺어 만주지역을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만큼 중국정부의 저항은 미약했다. 세세대대로 한족들에게 만주지역은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鷄肋)'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계륵보다 훨씬 못한, 뽑아내야 할 ‘충치’이거나 떼어 내어야 할 ‘종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들의 입장에서 만주는 조상대대로 국경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본토를 위협하거나 지배해 온 오랑캐들, 흉노, 부여, 고구려, 발해,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들의 본거지였으니. 더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 국민당 수뇌부와 피난행렬을 같이하며 맺어진 끈끈해진 관계를 통해 그들의 내면 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진 영토의식의 실체를 엿볼 기회가 많았을 것이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인의 내심의 국토에는 만주가 없었으며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수복의지 역시 미약하였음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8. 20세기 전반까지 만주는 진공상태

[자료제공=강효백 교수]


종전 1년전이라는 1944년이라는 시간과 힘의 진공상태에 임박한 만주라는 공간이다. 연합국 승리와 일본 패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의 일본세력의 패퇴와 그로 인한 만주지역의 힘의 진공상태가 도래할 것을 예견했다. 임정수뇌부는 간도 및 북방영토를 ‘대한의 영토’로 수복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포착, 이러한 염원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종 헌법인 헌장 제2조에 전격 수용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주석

(1)* 현재 전하는 『아방강역고』는 장지연(張志淵1864~1921, 친일 변절자로서 친일인명사전 등재인물)의 주석에 의해 재발행 되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규정되고 이후의 개정과정도 상당히 불투명하여 현재 전하는 『아방강역고』가 정약용의 판본과 같은지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흔히들 1861년 평민출신인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동국대전도를 토대하여 사적(私的)으로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상식의 오류’이다. < 대동여지도>가 조선을 대표하는 지도처럼 인식된 계기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수록한 후부터다. <대동여지도>는 <동국대지도>를 비롯한 300여종의 조선시대 지도와 달리 만주를 국토에서 제외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제의 구미에 부합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부각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