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만세운동 남쪽의 유관순과 북쪽의 동풍신은 서대문감옥에 같이 있었다
2019-02-27 07:31
작년 3·1절 행사 때 문 대통령은 '남쪽의 유관순, 북쪽의 동풍신'을 거론했다. 3·1절 만세운동의 거의 유일한 아이콘으로 되어있는 유관순에 비견되는 이가 북쪽에 있었단 말인가. 당시로선 이름조차 생소했다. 그뒤 동풍신에 대한 대중적인 조명이 이뤄졌다. 유관순(1902~1920)과 동풍신(1904~1921)은 닮은 점이 많다.
# 만세운동 = 1919년 3월 1일 서울 이화학당 고등과 2학년인 17세 유관순은 보신각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뒤 휴교령으로 고향 천안으로 내려갔다. 4월 1일 아우내(병천) 장날에 장터 한복판에 대나무장대에 매단 태극기가 걸렸고, 3천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일본군 헌병분대원들이 달려와 총검으로 시위자 19명을 죽였다.
함경북도 명천 태생이라는 것 밖에 알려져 있지 않은 15세의 소녀 동풍신은 3월 15일에 있었던 명천의 화대장터 시위에 등장한다. 그 전날부터 시위가 시작됐는데 5000명 군중에게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를 해서 시위자 5명이 죽었다. 이튿날의 시위는 그 죽음에 대한 항의까지 겹쳐 있었다.
# 아버지의 죽음 = "왜 이렇게 함부로 죽이느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본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본 헌병에게 격하게 항의를 했다. 헌병은 총검을 들어 그를 찔렀다. 이 장면을 보고 놀라 그것을 말리려 했던,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졸지에 부모를 학살당한 유관순은 군중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뛰어가 맹렬한 시위를 벌인다.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만세시위로 마을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있어선 안되겠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하가면사무소로 행진한다. 시위대는 친일파 면장을 끌어내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한다. 면장은 헌병 분견대로 도망쳤고 시위대는 거기까지 따라가 만세를 부르며 면장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때 길주헌병대에서 지원 나온 기마헌병 13명이 시위군중을 향해 총격을 한다. 시위대 선두에 섰던 동민수가 먼저 쓰러져 숨을 거둔다. 동풍신은 아버지의 주검 옆에서 통곡을 한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헌병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갑작스런 헌병들의 발포에 골목으로 숨어들어갔던 군중이 이 소리에 다시 나와 만세를 외친다. 이들은 다시 면사무소와 면장의 집을 불태운다.
# 법정의 항변 = 유관순은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내가 시위주동자다. 죄없는 다른 사람들은 석방하라."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어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공주감옥으로 이송된 뒤 유관순은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한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 죄를 지은 자는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형벌을 줄 권리가 있지,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어디에 있느냐." 그녀는 재판을 거부했다.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7년을 선고받는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다. 이 감옥에는 아침 저녁으로 유관순의 쩌렁쩌렁한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흘러나왔다. 6월 30일 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3월 1일엔 수감자들이 유관순과 함께 옥중에서 일제히 만세를 불러 일제를 긴장시켰다.
"제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미친 아이다." 명천에서의 시위를 사실상 주도했던 동풍신에게 일본경찰은 총을 쏘지 않았다. 그녀를 체포해 함흥형무소에 수감했다. 법정에서 동풍신은 열다섯 살 아이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아버지가 만세를 부르시다 총을 맞아 돌아가셨다. 딸인 나는 아버지가 부르시던 만세를 이어 부른 것이다." 이후 동풍신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다. 이 대목에서 가슴이 저릿해진다. 유관순이 들어와 있던 감옥에 동풍신이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볼 수 있었을까. 충청도 소녀와 함경도 소녀는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까. 역사는 이 놀라운 장면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 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 서대문형무소의 두 소녀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유관순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하루는 고문 끝에 방광이 터지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도 못했다.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8시 숨을 거둔다.
"어머 풍신이 아냐? 나는 명천에 화대동에 살던..." 동풍신이 서대문형무소에 왔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역시 만세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온 기생이었다. 그녀는 동풍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어머니 말야. 안됐지. 네가 잡혀간 뒤 실신해서 네 이름만 부르다가 돌아가셨지." 이 얘기를 듣고 풍신은 낙담과 충격을 이기지 못해 기절을 했다. 일제 앞에서 그토록 담대하던 소녀는, 어머니의 타계 소식에 그만 무너졌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던 끝에 1921년 죽음을 맞는다.
유관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올해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다. 국가유공자 1등급이다. 동풍신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