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 칼럼]서제막급(噬臍莫及)

2019-02-21 06:15

김종수 총괄부국장

 ‘파락호(破落戶)’. 행세하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허랑방탕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 단어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회자되고 있다. 올해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다.

김용환 선생(1887~1946)은 조선 말기 대표적인 파락호로 손꼽힌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이다. 명문가의 자제라는 말이 무색하게 노름에 빠져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그 금액이 무려 200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사실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 일원이었던 김 선생은 도박꾼 행세를 하며 주위 지인은 물론 가족조차 모르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주변의 온갖 비난 속에서도 그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변 동료들에 의해 뒤늦게 알려졌고, 1995년 그의 외동딸 김후웅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건국 훈장을 받았다.

김 선생과 같은 순국선열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정부와 기업, 국민은 지금 이 순간도 자신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특히 기업들은 최근 중국 업체의 빠른 추격과 보호무역주의 확대, 지속되는 세계 경제 불황 등 각종 대내외 악재에 맞서 고군분투하며 우리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성전자, 현대차 등 5대 그룹이 일자리 창출을 위해 3~5년간 약속한 총투자 규모만 무려 300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기업들을 빈부격차 등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기업들이 ‘현대판 파락호’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는 지난달 열린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정부의 경제 인식을 요약해보면, ‘국가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듯싶다. 우선 수출 6000억 달러, 세계 6위 수출국, 국민소득 3만 달러, ‘30-50클럽’ 가입 등의 지표를 근거로 국가경제는 성장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국민들이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 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상위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되고 모든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라며, 대기업 지배구조로 인한 ‘분배 불평등’을 최대 문제로 꼽고 있다. 이에 대해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은 대기업의 성과에 매달려 경제가 좋다고 자랑하면서 대기업을 비판하는 꼴이라고 꼬집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정부의 정책기조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각부 장관과 여당 대표 등은 친기업 노선을 구체적으로 표방하며 현장 방문을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여전히 기업들에 부담을 떠넘기며 글로벌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대표적인 게 법인세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의 법인세 부담률은 미국 애플, 인텔 등에 비해 최대 3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정부는 많이 버는 기업이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을 기조로 삼고 법인세 인상을 주도했다. 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한 후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대폭 내렸다. 그 결과, 미국 기업들의 수익은 대폭 늘어나고, 직원들의 임금은 오르고, 투자는 확대되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이렇듯 미국을 비롯해 독일, 일본 등 주요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제조업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경쟁력 강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우리만 거꾸로 가는 정책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은 기업들을 옥죄고 있다. 이미 국내 최고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 현대차조차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회사 측이 주휴시간의 최저임금 가상시급 계산에 대비해 비정기 상여금을 매월 쪼개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노조가 완강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에 따르면 기본급만 계산했을 때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직원은 6000여명으로 추산된다. 현대차의 노조 조합원 5만5000명 중 11%가 최저임금 위반 대상인 셈이다. 이렇게 되면 폭스바겐, 도요타 같은 선진 자동차 메이커와의 경쟁력에서 밀려 현대차의 생존력이 약화될 것이 뻔하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제도도 그것이 지나치면 ‘서제막급(噬臍莫及)’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경제 대국 사이에서 우리가 경제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 기업들이 기를 펴고 스스로의 경쟁력을 높일 때 가능한 일이다. 일부 그릇된 정책과 불필요한 규제가 기업 경쟁력 강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점검해보고 수정·보완해야 한다. 기업들의 경쟁력을 제고해 나가는 것이 이제 우리 경제의 생존과 직결될 수 있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날 선 지적을 곱씹어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