亡國을 막아선 최후의 실력자
2019-02-07 18:39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⑰ 마지막 대신의 맹렬한 저항, 꺼져가는 대한제국엔 그가 있었다
‘병합 신중론’ 이토 이용해, 亡國 늦추려 ‘칭송 시늉詩’ 쓰며
동양척식회사 설립 음모에 저항… 송병준 축출 등 앞장
아관파천으로 잔뜩 기세를 올렸음에도, 소소한 이권에나 열을 낼 뿐, 러시아는 굼떴다. 그들의 목표는 만주였고, 한반도는 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차츰 확연해지자, 친러파들은 한둘씩 일본에 붙었다. 생명선(生命線)을 놓지 않으려는 일본에 비해, 부동항(不凍港)을 기웃거리는 러시아에는 전쟁에 임하는 단일의지가 부족했다. 도쿄는 가깝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멀다. 고종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1904년 2월 8일, 일본 연합함대의 뤼순항 야습(夜襲)으로 러일전쟁은 시작됐다. 다음날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 두 척이 격침됐고, 일본군은 경의선을 따라 압록강을 건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러시아군대는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동농이 갑오개혁에 이어 10년 만에 입각한 게 3월 8일. 고종은 그를 교섭 창구로 내세워 일본의 압력을 줄여보려 했던 것 같다.
이 추론을 뒷받침하듯, 동농은 3월 31일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됐다. 외부대신은 박제순이었고,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이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조인하고 난 한 달 뒤였다. 이지용은 전쟁에 협력을 다짐하는 보빙대사로 일본에 갔고, 이근택은 주일특명전권대사였으며, 권중현은 영접위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맞는다. 을사오적이 총출동해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고 있으니, 고종의 심통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왕 곁을 떠나지 못하는 동농
별입시(別入侍, 왕이 사사로이 불러 대소사를 맡기던 신하)로 보필하기 시작한 1885년 이래, 동농은 고종이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마다 그를 지켰다. 1887년 최초의 해외상주 외교관으로서 자주외교의 밀명을 수행했고,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때는 목숨을 걸고 어전에 나아가 수습책을 상주했으며, 갑오개혁을 이끌었다. 반면, 민씨들이 국정을 농단하거나 친러파, 친일파가 득세할 때면 그는 어김없이 조정에서 밀려났다. 그래도 동농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1904년 6월, 고종은 그를 궁내부 비원장(祕苑長)에 임명하고, 비원 중수(重修) 책임을 맡겼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 일어난 판에 한가롭게 정원 공사를 벌인 임금도 딱하지만, 명을 받든 신하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동농이 분부받잡고 집짓기를 마치자, 고종은 수고했다면서 이번에는 네 집을 지으란다. 황망하기 짝이 없는 어명 아닌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온 겨레가 목놓아 울던 그 날(을사조약, 1905), 동농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과 함께 자결을 상의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가족들의 만류와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정정화, <장강일기>, p28).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했다. 이럴 때 고종이 그들의 손에 근왕군(勤王軍)의 깃발을 쥐여주면 얼마나 좋으랴. 죽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하고. 동농은 왕 곁을 떠나지 못했다.
◆“관찰사 김가진 씨 강경 정직함을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906년 5월, 동농은 충청남도관찰사에 임명됐다. 대신을 세 차례나 지낸 중신(重臣)이 방백(方伯)으로 좌천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서 3등으로 강등됐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는 김가진을 잘 알았다. 동농의 주일공사 시절부터 따지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재주와 국량을 재본 사이였다. 이토는 김가진이 고종 곁에 있는 게 마땅치 않았다. 일본은 아직 조선반도에 뿌리를 못 내렸다. 이 남자는 한성(漢城)에 두면 안 된다. 충청도로 가는 길. 의병에게 내리는 군왕의 밀지(密旨) 한 장 없이 백성을 대하러 내려가는 늙은 신하의 눈에서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명이라도 그들이 덜 상하게 하는 것뿐이구나….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겼다.
이는 조선반도 전체가 일본인의 치외법권 지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농은 성씨조차 알려지지 않은 백록(百彔)이라는 사람이 일본인들에게 맞아 죽자 “살아서는 가족도 없고 죽어서는 성(姓)도 알려지지 않은 불쌍한 고혼”을 달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그는 조정에 통감부 및 일본 관헌과 교섭해 가해자들이 엄정한 처벌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한홍구, <김가진평전>).
다카키(高木)라는 일본인이 공주산성 얼음창고부지에 건물을 짓고 영업을 하겠다는 청원을 제출했다. 관찰사 김가진은 이것이 산성을 점탈(占奪)하려는 간계임을 파악하고 불허했다. 그러자 다카키는 농상공부에 손을 써서 허가를 득한 뒤, 관찰사를 다시 찾아왔다. 고개를 젓는 김가진에게 일본인들이 몰려와 협박했고, 그가 “죽음으로써 국법을 지킬 터이니 너희는 나를 죽이고 산성을 점탈하라”고 호령하자, 일본인들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갔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12월 15일자 3면,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동농이 충청남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충남 민심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정적(政敵)들이 퍼트린 ‘가짜뉴스’ 때문이었다. 황해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돈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을 많이 만들었다, 중추원의장으로 있으면서 의관(議官) 직을 팔았다, 등등. 하지만 동농을 실제로 겪은 뒤, 사람들의 생각은 180도 달라졌다. <대한매일신보>는 “관찰사 김가진 씨 강경 정직함을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보도했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11일자 2면, 한홍구 <김가진평전> 재인용>.
혹자는 충청남도관찰사 김가진이 의병을 탄압했다고 비난한다. 일제의 의병 사형집행 명령문서 <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에서 확인되듯이, 이 시기 군대, 경찰, 검찰은 통감부 수중에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과 영국인 베델(E. Bethell)이 만들던 국내 유일의 항일독립신문이었다. 논조가 어찌나 곧았던지 일제가 눈엣가시로 여겼는데, 이런 신문이 ‘의병 탄압하는 친일파 관찰사’ 따위에게 미담을 소개하는 지면을 나누어줄 리가 있나. ‘의병 탄압’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대한협회 회장으로서, 망국만큼은 막아보려 했으나
한쪽에서는 농민군의 맥을 잇는 의병이 피를 흘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독립협회의 흐름을 계승한 대한협회가 목소리를 높였다. 고종은 여전히 둘 다 안 믿고,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동농은 대한협회 2대 회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의 선두에 섰다. 대한협회는 회원수 5만에 달하는 최대의 애국단체였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부활시켜 민의(民意)를 결집하는 한편, 병합이 시기상조라던 이토 히로부미의 환심을 사서라도 망국만큼은 막아보려 애썼다. 이게 1908년 5월 이토의 67회 생일, “혁혁한 공을 세운 이름은 세상을 덮어 꽃피고 온몸은 후지산의 정기를 서렸도다”는 축시를 써준 배경이다.
대한협회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즉 동척 설립 반대운동도 주도했다. 1908년 9월 14일 대한협회는 회장 김가진 명의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질문서를 보내, 전국의 토지가 점차 동척 수중에 장악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일본인 이주자 규모를 제한하려는 방침인지 물었다. 궁녀를 건드린 송병준을 성토해 내부대신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왕조를 살리기 위한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망국의 순간까지 동농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의병을 ‘폭도’라 부르는 대한협회가 대체 무슨 힘으로 삼천리강산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그는 시종일관 제국의 대신이었으며, 그 자리에 서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으려 했다. 우리 근대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었던 그 자리야말로 망국의 원죄라는 맥락을 마침내 깨달은 이는 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대신은 동농 그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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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日 대한자강회 해체된 뒤
회유 위해 日이 허락한 단체
대한협회(大韓協會)
1907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조직되어, 1910년 9월 국권 피탈 직후까지 활동한 정치단체다. 1906년 창립되어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주지로 삼고 계몽운동에 앞장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 투쟁하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뒤 대한자강회의 고문이던 오가키(大垣丈夫)가 이토(伊藤博文)의 내락을 얻어 1907년 11월 10일 윤효정(尹孝定)․장지연(張志淵) 등 이전의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대한자강회가 해산된 지 겨우 3개월 만에 그 구성과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대한협회가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한국의 배일적인 지식인들을 한 단체로 규합하고 회유하여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반일투쟁에의 참여를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1908년 7월 남궁억의 사임으로 김가진(金嘉鎭)이 2대 회장이 되었다. 세율의 교정, 재산 피탈 사건의 조사, 강연회 등을 통해서 국민의 권리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이와 같은 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신리강구소(伸理講究所)를 설치, 토호의 탐학 금지와 부당함 등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국민을 지도․계몽하였다. 또한, 회보를 통하여 정치·사상·역사 등을 밝혔으며, 각 부서의 활동을 통하여 <대한지지(大韓地誌)>, <외교약사(外交略史)>, 세계지리, 문예 등을 광범위하게 취급하여 교양․계몽에 힘썼다. 회보는 매월 2000부 이상 발행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미국에까지 보급하였다.
창립 당시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항일운동을 강력 추진하였으나, 점차 그 성격이 변하였다. 1909년의 시국에 관한 견해는 통감부의 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비판, 거부하지 못하고 점진적인 시정개선이나 건의를 하였다. 특히, 항일의병투쟁을 지방 소요로 규정하고 그 진압을 지금의 급선무라고 하였다. 이전에도 의병투쟁의 정신을 찬성하는 듯하면서도 방법에 대하여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한협회의 지도부는 일제의 보호정치를 한국에 대한 문명지도로 인식하고, 보호조약은 한국의 문명부강이 되면 자연 취소되면서 국권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견해는 국권 회복이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력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협회의 현실 인식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매우 불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