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SKY 캐슬' 김서형 "김주영役, 손발 다 묶인 채 연기하는 기분…감당 안 돼 괴로워"
2019-02-07 07:00
JTBC 드라마 '스카이(SKY) 캐슬'(극본 유현미 연출 조현탁) 속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의 대사는 꼭 배우 김서형(46)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그는 '스카이 캐슬'의 대본을 받아들고 한참을 고민하고 셀 수 없는 고민과 갈등에 빠졌다. 불친절하고 무거운 캐릭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우려 때문이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할까봐" 몇 차례 거절했으나 '운명'은 결국 '운명'이라고 했던가. 결국 김서형은 김주영 캐릭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주영 캐릭터는 한서진(염정아 분), 강준상(정준호 분) 등 다른 어른 캐릭터들의 시놉시스와 줄거리 등과는 달리 캐릭터가 많이 드러나 있지 않았어요. 작가님과 감독님께 궁금한 걸 물어봐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시지 않았죠. 그저 '한서진과 김주영은 일맥상통할 거다. 결국 엄마다'라는 정도만 말씀해주셨어요. 저는 배우지만 스스로 제 역량을 체크할 수는 없어요. 작품은 만나봐야만 알 수 있으니까요."
극 중 김주영은 대치동 엄마들도 모르는 극소수 아는 사람들만 아는 톱급 입시 코디네이터다. 포커페이스라서 감정의 동요를 전혀 읽을 수 없고 겉으로는 합리적, 이성적, 객관적인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맹독을 품고 있는 대한민국 사교육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야누스 같은 여자다.
극 초반 김주영이 코디를 맡고 있던 영재(송건희 분) 가족이 파멸하고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뒤 방송 중후반까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사건에 대한 단서는 풀리지 않아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극한 캐릭터기도 하다.
이 '미스터리'는 시청자들에게는 '즐거움'이었으나, 김서형에게는 괴로움이자 곤욕이었다. 시작 전부터 휘몰아치는 압박과 부담감에 김서형은 소속사 대표에게 "이 작품을 하게 된다면 너희들도 많이 힘들 것"이라고 선전포고까지 했다고.
"저는 저를 잘 알잖아요. 대표에게 '나는 이 작품 못 한다. 만약 한다고 하면 너희들을 많이 괴롭히게 될 거다.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가면서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면 너희에게라도 한풀이하겠다'고 했더니 저를 설득하고 다독이면서 출연을 종용했죠. 사실 대본 연습하러 가는 날까지도 입이 댓발 나와 있었어요. 하겠다고는 했지만 제가 이겨내야 할 아픔에 관해서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회사에서는 계속 '내 촉을 믿어보라'고 하고 있고. 하하하. 방송 직전까지 '나 이거 왜 시켰어'라고 투정하고 그랬었어요."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현장에서 못 버텼을 거예요. 정말 지혜롭고 존경스러운 분이에요. 많은 배우를 이끌어가는 선장인데 지혜롭게 어루만져주시죠. 배우들의 속을 정말 잘 아세요. 관찰력이 정말 좋으셔서 배우들의 연기 디테일을 캐치하시고 '왜' 그렇게 연기했는지 훤히 들여다보시죠. 우리끼리는 '감독님 정말 무당 같다'고 했다니까요. 우리가 잡은 캐릭터의 성격, 디테일 같은 것도 다 파악하고 계시니까 그게 재밌어서 더 신나게 연기했던 것도 있었던 거 같아요.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샘 솟더라고요."
촬영 당시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마음은 첫 방송 이후 제대로 불붙었다. '스카이 캐슬' 첫 회의 주인공 격인 사건의 중심 명주(김정란 분)의 활약이 김서형을 비롯한 배우들의 마음에 연기 열정을 되살린 것.
"첫 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해줬단 말이야? (김)정란 선배 정말 이 정도까지 해냈단 말이야?' 하고요. 첫 방송 보고 배우들끼리 더 바빠졌어요. '연기를 어떻게 더 잘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죠. '저렇게 잘해주고 빠지면 우린 어쩌지!' 하면서요. 하하하. 선의의 경쟁도 분명 있었던 거 같아요."
김서형의 고민 그대로. 김주영 캐릭터는 감정 스펙트럼이 좁은 가운데 모든 서사를 표현하고 시청자들을 이해 시켜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 마치 손발을 다 묶인 채 분투하는 듯했다.
"'왜 이렇게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경력에 이렇게 괴로움을 느끼는 게 유난 떠는 것처럼 느껴졌죠. 제 역할을 다른 선배들이 했다면 이렇게 괴로워했을까? 선배 배우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배우가 돈을 받고 일하면서 이런 고충쯤은 있을 수 있는 건데 혼자 유난 떠는 거 같기도 하고. 드라마에 선악은 없지만 모든 캐릭터도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각자의 고민과 고충은 결이 다를 뿐인데. 드라마 중반까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김주영은 머리 꼭대기에 있는 여자"라 이해하려 할수록 더욱 마음만 답답해졌다. 그를 '악역'이라 생각지 않고 그의 내면을 이해해보려 했던 그는 드라마 후반부까지 풀리지 않는 정황이나 심리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었다. "작가님께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김주영의 감정신이 "워낙 폭발적"이라 "쌓아둔 뒤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묻지도 않았다고.
"작가님이 나중에 그러시더라고요. '혜나를 댁으로 들이십시오'라고 한 뒤부터 딱 막혔대요.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난 서형씨가 전화할 줄 알았어. 그런데 너무 대단한 게 전화를 안 하더라'고요."
어느덧 데뷔 25년 차. 1994년 KBS2 드라마 '내일은 사랑'으로 데뷔해 '창공(1995) '행복한 아침'(1997) SBS '파리의 연인'(2004) '그린로즈'(2005) '연인이여'(2007)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세련된 이미지의 전문직 여성 역할을 도맡아왔다. '아내의 유혹'(2008) 이후 악역 이미지가 각인된 그는 '신드롬적' 인기에도 불구 10여 년 간 새로운 작품을 만나기가 어려웠다며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은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악역이 싫다는 게 아니라 저는 어떤 역할도 '악역'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배우로서 어떤 캐릭터를 해냈을 뿐인데 '악역 전문'이라는 게 따라다니니까. 힘들기도 했었죠. 아니 누군 태어날 때부터 '나는 악역을 할 거야, 응애'하고 태어나나? 악역이 싫다기보다는 다른 표현이 없을까 생각했던 거예요."
'아내의 유혹' 신애리는 배우로서의 인지도와 대중성을 주었지만 동시에 어떤 '낙인'이기도 했다. 김서형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아내의 유혹' 신애리를 벗어나기 위해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스카이 캐슬' 김주영을 만난 뒤 마음가짐도 달라졌다고.
"김주영을 하고 나니까 이것이 '선택'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의 숙명이라면 김서형이 한다면 다른 것, 김서형만의 것을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종류의 캐릭터를 봤을 때 '아, 이건 김서형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는 거요. 그간 제가 힘들어했던 10여 년의 시간이 허투루 보낸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앞으로의 김서형도 그렇게 잘 보낼 수 있겠구나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