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눈]3.1운동 대표에서 빠진 조선선비들, 파리장서 들고 프랑스로 달려간 까닭

2019-01-31 17:20

[파리장서 추모비]




3.1운동을 들여다 보면서, 뭔가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유학자(유림, 儒林)가 없다. 조선 500년 정신을 이끌어온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유림은 왜 민족대표에서 빠졌는가.

"나는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첫번째 을미년(1895)에 죽지 못하였고 다시 을사년(1905)에 죽지 못하고 산으로 들어가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했는데 혹시 쓰임이 있을까 해서였다. 이제 그런 희망이 없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바라겠는가. 변란소식(한일합병)을 듣고 여러 날이 지났는데 아직 이렇게 결행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자진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장차 명동에서 죽고자 한다."(1910.8.14. 유림 이만도 한일합병 반대 단식을 시작하며). 이렇게 쩌렁쩌렁했던 유학자들은 3.1운동 때 뭘 하고 있었던가.
 

[파리장서 100주년 발기인 대회]




# 심산 김창숙, 독립선언서 서명하려다 지각했다?

이 수수께끼는 역사의 변곡점을 이루는 1919년의 중요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심산 김창숙은 자전에세이('기미유림단사건에 관한 추억의 감상')에서 이렇게 밝힌다.

"1919년 2월 한 선배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편지를 받았는데 모친의 병환 때문에 늦게 갈 수 밖에 없었다."

글을 보낸 사람은 김천 출신의 만석 거부(巨富)로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성태영(成泰英)이었다. 편지에는 "광무황제(고종)의 인산(장례식)이 3월2일 거행된다. 그때 일부 인사들이 모종의 일을 일으키려 한다. 자네도 바로 서울로 와서 때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심산은 2월 25일에야 서울로 올라갔다. 성태영은 "3월1일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참일세. 그 사이 군(君)을 고대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선언서에 참가할 기회를 잃었네"라고 말한다.

# 나라 망칠 때는 온갖 죄악 다 지어놓고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심산은 현장에서 선언서 몇 장을 구해 서명한 33인의 이름을 살펴본다. 천도교(15), 기독교(16), 불교(2) 3개 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디를 봐도 유림은 없었다. 그는 탄식했다. "조선 유사 이래 모든 문화를 창조한 유림으로서 이 선언서 대표자 중에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하다니!" 그는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했다.

심산이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지켜보던 한 군중이 이렇게 외쳤다.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놈들이 온갖 죄악은 다 지어놓고 오늘날 민족 독립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않았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

심산이 제때 상경을 못하는 바람에 33인에서 빠졌다는 주장은, 그의 자서전 외에서는 찾기 어렵다.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주최측에서는 당초 유림을 포함하고자 했으나 유림 측의 미온적 태도로 넣지 못했다고 한다, 심산에게 참여를 요청한 것은 그 과정이었을 수 있다.

# 독립선언서에 왕정 복고 없어 불참?

유림은 고종의 국장 의례에는 의미를 두었으나 서울의 만세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아직 시대 변화에 대한 의식각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유림들은 독립선언서에 왕정복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을 문제 삼았다. 이런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은 유림전통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국가 지도층 그룹이라는 뿌리깊은 자의식이, 신학문을 배운 새로운 지식인층이나 종교단체의 리더와 나란히 행동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머리 깎고 양복 입은 자들과 동렬에 서는 일을 수치라고 여겼다.

또 황제의 서거를 기리는 인산일을 기해 항일시위를 한다는 점에 대해 불경(不敬)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3월1일의 분위기는 그들이 예상하던 퍼포먼스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만세시위 행렬에 어린아이와 부녀자까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심산은 몹시 놀랐다고 한다.

# 독립 원하지 않는다?

만세 시위 당시 유림이 욕을 먹었던 까닭은 다른 것에도 있었다. 흥선대원군 부인 민씨의 종제인 민용호(승지를 지낸 사람으로 궁중일에 밝았다)는 고종 독살의 경위를 이렇게 전했다.

"일본은 국제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가 상정되지 않도록 하려고, 이완용을 시켜서 한국 인민이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 원래 이름은 합방절대지지 한일불리(不離)청원서)'를 작성케 했죠. 이완용은 문서의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해 고종에게 날인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이완용을 크게 질책했습니다. 그러자 이완용은 이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고 내시를 시켜 고종에게 독이 든 식혜를 올렸습니다."

이 말은 유림을 크게 격동시키고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지만, 유림에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된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완용이 작성한 독립불원서에는 귀족대표 이완용과 나란히 유림대표 김윤식(金允植)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2월에 독립선언서 서명자를 정할 때 김윤식에게도 콜이 왔다. 그는 독립청원서를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선언서 발표는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랬던 김윤식은 이완용이 만든 '독립불원'에다 이름을 올려놓았다. 독립불원서와 이완용의 독살설은 3월 만세운동 때 거리에 뿌려져 많은 이들이 공유한 내용이었다. 유림이 대중의 조롱과 분노를 접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자문하게된 참담한 날들이었다.

# 고종 망명계획, 유림이 도왔다

하지만 유림이 독립운동 자체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1918년 파리 국제평화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주의가 강조되자 이회영은 오세창, 한용운,이상재, 안확, 유진태, 임경호, 이득년과 만나 고종 망명계획을 세운다. 유진태, 임경호, 이득년은 유림 계열이며 이회영의 측근이다.

이회영은 황실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황제가 일제 폭력상을 세계에 직접 폭로하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황제에게 전하고 황제망명계획을 타진한다. 고종은 이 계획에 찬성했다. 황실측근인 민영달이 5만원을 내놓았다. 배를 타고 망명한뒤 북경에 설치해놓은 행궁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북경에 있던 이시영은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임차하기 위해서 국내 이회영 측으로부터 망명자금을 전달받았다. 이 계획은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런 서거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유림들이 겪은 '아노미현상'을 엿보게 한다. 어떻게든 황제와 황실을 중심으로 독립을 이뤄내보려던 그들의 꿈은 그해 1월 산산조각이 났다. 근왕(勤王)의 세계관이 갑작스레 수명을 다한 지점에서 그들이 선택할 것은, 전혀 다른 낯선 세계였다.

# 유림들, 3.1운동을 지방에 정확히 전파하다

1919년 고종의 국장(國葬)은 지방의 많은 유림들을 상경케 했다. 기차를 탈 수 없는 이들은 걸어서 왔다. 배를 타고 오기도 했다. 국장이 임박한 2월27일 '남대문정거장'을 통해 서울에 들어온 사람이 보통 때의 4배인 6천명에 달했다. 인산을 참관하기 위해서 상경한 이들도 있었지만 스승이나 문중 원로의 지시를 받고 온 경우도 많았다. 유림들은 3월3일의 장례식(인산)과 5일의 반우제(장례를 끝내는 예식, 초우. 청량리에서 거행했다)를 지낸 뒤 다시 귀향했다. 이들이 빠지자 만세시위는 소강 상태가 될 정도였다.

유림들은 귀향한 뒤 만세운동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동료나 스승, 문중 원로에게 서울의 상황과 시위의 형세, 그리고 시위의 주요원인이 된 고종독살설과 당시 진행되고 있던 파리 독립청원서 등의 정보를 세세하게 알렸다. 이런 역할이 연쇄적인 지방 만세시위를 가능케 했다. 거기에다 귀향 유림들은, 이번 만세시위에서 유림이 소외된 상황 또한 자세히 전해, 유림들의 각성을 이끌어내는 구실도 한다.

유림들은 3.1운동 이후 나름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3월5일 청량리에서 유준근, 송주헌 등 유림 15명이 순종의 복위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황제는 뒷일을 염려하지 말고 자주독립을 선포하라"고 외쳤다. 송주헌은 반우제를 마친 순종의 행차가 청량리를 지날 때 기습적으로 상소 전달을 시도하다가 체포됐다. 어대선은 그날 "민족자결주의의 좋은 기회를 잡자"는 유림대표 명의의 연설문을 낭독하려다 수감된다.

12일 유준근, 백관형 등 유림 6명은 조선민족대표 명의로 민족대표 33인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장서를 펼쳐놓고 외치다가 붙잡혔다. 4월23일 이내수, 이용규, 최전구는 13도 대표자 명의로 국민대회 취지서에 서명했다. 이 취지서는 임시정부의 조속한 설립을 촉구하고 있었다. 한편 유림 이용규는 이 취지서에 공화제를 지지하는 내용이 있음을 알고 서명자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1월엔 대한민족대표 명의로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 서명이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대표 뿐 아니라 황실대표, 귀족대표, 유림대표, 상공업대표까지 참여해 명실상부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임을 표방한다.
 

[파리장서 곽종석 스토리를 연극으로 꾸민 '아! 파리장서'.]

[연극 '아! 파리장서']

 

[곽종석의 파리장서 스토리를 다룬 연극 '아!파리장서'.]




# 파리장서 운동, 대한민국 유림 일어서다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은, 3.1운동 이후 새로운 독립의식으로 전환하게된 유림들이 국제 무대의 독립청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역사적인 활동이다. 유림대표 137명은 파리강화회의에 2,674자의 장문으로 된 한국독립청원서를 보낸다. 당시 영남 유림의 영수였던 곽종석이 호서유림을 지도하던 김복한과 손을 잡고 만들어낸 장서였다. 곽종석은 이렇게 말했다. "망국의 대부(大夫)로서 항상 죽을 곳을 얻지 못했는데 이번 이 전국유림에 앞장 서서 천하만국에 대의를 소리치게 되었으니 이는 노부가 죽을 곳을 얻은 날이다." 파리장서를 작성한 곽종석은 1896년과 1905년 구미공관에 만국공법에 근거하여 일제를 제재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파리장서에 서명하며 하용제도 같은 말을 했다. "드디어 죽을 곳을 얻었구려."

심산 김창숙은 이 장서를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간다. 임정에서는 이 내용을 다시 영문으로 번역했고 한문 원본과 함께 3000부를 인쇄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냈고, 중국과 국내 각지에도 배포한다. 이 사실은 성주 만세시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송회근에 의해 드러났다. 하지만 완강히 비밀을 지켜 곽종석, 장석영, 송준필 등 20명만 노출되어 체포됐다. 이후 상하이에서 고을 향교로 발송된 청원서가 발견되어 137명의 이름이 알려졌다. 파리장서 사건 이후 일제의 검거선풍이 일었지만, 변절자는 한명도 없었다.

파리장서에는 친일파들이 파리평화회의(1919년 1월~6월)에 독립불원서를 제출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인민과 사천년여의 역사를 지니고 어찌 남의 나라의 대치(代治, 대리통치)를 바라리오. 대치는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한편 성균관은 2019년 1월29일 서울 명륜동 유림회관에서 전국 유림대표와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후손 등 3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유림 파리장서 100주년'을 기리고 파리장서 100주년 추진위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