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김 “최재형처럼 숭고한 가치 추구해야“

2018-12-11 06:00
창작뮤지컬 페치카 통해 숨어 있던 독립운동가 알리기 나서

주세페 김 K문화독립군 대표 [김세구 기자 k39@aju]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창작뮤지컬 ‘페치카’를 선보이는 'K문화독립군'의 주세페 김 대표는 숨어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삶을 알리는 일에 나서고 있다. 그가 연기하는 최재형에 몰입해 있는 탓인지 수염을 기른 얼굴에 빵모자를 눌러 쓴 모습부터 인터뷰 내내 그 시절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는 듯했다. 김 대표에게 최재형을 연기하고 있는 의미를 물었더니 뮤지컬을 만든 사연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안중근 의사를 다루다가 최재형이라는 인물이 튀어나왔다. 최재형은 안 의사의 하얼빈 거사 이전에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활동했다”며 “안 의사 가족은 하얼빈 의거 기획 단계에서 위험할 것을 알고 거사에 즈음해 러시아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 최재형은 러시아 고려인들의 지도자
안 의사의 거사가 일어난 1909년 당시 중국은 교민들의 입지가 튼튼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연해주는 1860년대부터 함경도 등 조선의 이탈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떠난 곳이다. 1910년대까지 50년의 세월 동안 고려인들이 정착해서 터전을 잡고 있었다. 당시 20만명의 고려인들이 있었고 망명한 독립운동가를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 대표는 “최재형은 러시아 고려인들의 지도자 격이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 '동의회'의 총재였다”며 “지역 사회에서 저명 인사이자 기업인으로 역량을 갖추고 있던 사람으로 1860년생으로 1920년까지 살았다”고 설명했다.

최재형은 10세 경 러시아로 떠났다. 어머니는 관기, 아버지는 노비 출신으로 조선에서는 희망을 볼 수 없었던 위치였다. 뱃사람이 됐던 최재형을 러시아 선장 부부가 입양한다. 11세에서 17세 사이에는 세계일주를 두 번 했다. 원양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일본, 동남아, 인도, 아랍, 희망봉을 거쳐 네덜란드, 성페테르부르크를 돌면서 물건을 조달해 파는 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를 타고 다니면서 러시아어에 능통하게 되고 공부도 잘해 촉망받는 청년 지도자가 됐다.

최재형은 통역을 하는 등 고려인들에 도움을 주다가 사업을 바꿔 군사물자를 납품하는 등 사업을 하면서 러시아의 관료들을 알게 되고 소수민족을 관리하는 고려인 지도자로 낙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황제도 두 번 알현하는 등 '도헌' 역할을 하면서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은 행정 관료로 한인 마을마다 학교를 지어준 것으로 돼 있고 비공식적으로 32곳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 독립운동가들에게 신식 무기 공급
최재형은 교육사업과 함께 신문사도 운영했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깨닫고 무력을 키우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면서다. 무력이 아니면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어렵다며 직접 싸워야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되고 자금을 무기 사는 데 투입한다. 군수사업을 했기에 옛날식 무기가 아니라 러시아의 신식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다. 벌어들인 자금은 안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도 투입한다.

최재형은 학교를 짓고는 월급은 쓰지 않고 학생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안 의사가 사령관으로 독단적으로 중국에 갈 수 없었던 가운데 배후에 동의회가 있었고 정황상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최재형이 했던 것으로 김 대표는 추정하고 있다. 김 대표는 “최재형에 대한 조명이 되지 않아 스토리를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에 권총을 줬고 안 의사의 가족을 보살폈다. 안 의사가 재판 받을 때 러시아 변호인단을 보냈다”며 “안 의사는 최재형이 사주인 대동공보 신문사의 출입증을 가지고 하얼빈에 갔다. 안 의사의 의거는 일본이 식민지 정책을 바꿔야 할 정도로 세계사를 바꾼 일이었다. 러시아 문헌에는 26명이 조를 이뤘다는 기록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안 의사의 조력자에 동의회 총재인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의 지원이 없었으면 러시아 독립운동이 성립될 수 없다”고 밝혔다. 최재형은 1910년 대동공보 신문사에 안중근 의거를 대서특필하기도 한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이 득세하면서 쫓겨 다닌다. 

김 대표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에서는 독립운동이 힘들어졌다. 러시아는 백군파, 적군파로 분열되고 러시아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연대하고 적군파와 싸운다. 독립운동가들은 적군파와 손을 잡는다"라며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반공을 강조하던 시절에는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러시아의 초기 공산주의도 이상주의자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왜곡됐고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도 있다. 고려인들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스러져 갔다”고 설명했다.

최재형은 생존을 위해 나라를 떠나야 했던 사람으로 나라가 포기하고 돌보지 못했던 인물이었지만 1919년에는 퇴임해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가 돼 있었다. 1920년 일제는 항일 세력에 덫을 놔 연해주 일대 항일 러시아 세력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최재형은 고택에서 체포된 것으로 일기에도 남아 있는 가운데. 가족과 동료를 살리기 위해 '더 살면 뭣하나, 내가 앞으로 걸어 나가면 너희들이 산다”며 투항해 잡혀갔다.

김 대표는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회주의와 연관돼 있다며 묻히도록 놔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통합적으로 역사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령임시정부는 상해임시정부보다 먼저 있었다. 러시아 독립운동이 중국의 독립운동을 앞서 갔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며 “러시아의 귀중한 독립운동 역사와 고려인 이주의 애환을 살펴야 한다. 1930년대 스탈린 시대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다시 타게 된다. 혁명 이후 스탈린의 소수민족 말살 분산 정책에 의해 고려인들이 힘들게 일궈놨던 터전을 떠나야 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최재형은 별명이 따뜻한 난로인 '페치카'였다. 고려인에 난로 같은 존재였다. 고려인 지도자였을 때는 가가호호 최재형의 사진을 걸어놨을 정도였다고 한다”라며 “대하 드라마 토지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이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지만 최재형의 이야기는 소설로도 쓰기가 힘든 실화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3·1운동, 임정 수립이 그냥 된 것이 아니고 나라가 망하고 거의 15년 이후에 이뤄졌다. 식민지 군국주의에 회의를 느낀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모든 세력이 이유 없이 하나가 됐던 통합 운동이었다”라며 “최재형이야말로 페치카 정신,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100년 전에 돈 버는 방법과 쓰는 방법을 알았던 사람이다. 무수저 출신 자수성가한 기업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다”라고 평가했다.

[랑코리아]


◆ 내년 각지서 공연 예정
그는 “지난해 11월에는 용산아트홀에서 쇼케이스 뮤지컬로 절반 정도의 분량을 선보였다. 내년에는 7월 5일 KBS홀에서 2회 공연을 하면서 80% 정도로 다듬은 내용을 내놓을 계획이다”라며 “세종문화회관 공연도 거의 완작이지만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어 샘플 개념인 갈라콘서트로 선보이기로 했다. 완작은 내년 공식적으로 내놓을 예정”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인터뷰 도중 담당 공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기교육청이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공연을 선보이기로 돼 있는데 내년 3월 27일, 28일 4회공연을 하기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김 대표에 전했다. 내년 8월 15일에는 천안예술의전당 공연이 예정돼 있다.

김 대표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내 구미꼬 김 때문이다. 부인은 7세 때 우리나라에 온 이후로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트라우마가 있어 음악을 전공했지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부인 예명을 구미꼬 김으로 바꾼 뒤에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재일교포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름을 설명하면서 문제가 자연스럽게 치유가 됐다는 설명이다.

김 대표는 “최재형은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통일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3·1 정신은 정치,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천도교, 대종교까지 모두 조건 없이 나라 찾겠다고 하나된 마음으로 나섰던 운동이다”라며 “일본을 배타적으로 해 항일 하자는 게 아니다. 투쟁의 대상은 외세가 아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이다. 찌들어 있지 말고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할 수 있는 숭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