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IMF 질긴 '악연'…'악몽' 재현되나
2018-09-03 10:56
아르헨-IMF, 4일 워싱턴DC서 구제금융 재협상…'IMF=위기' 악연에 양쪽 다 부담
"아르헨티나인 대다수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위기와 고리대금업자의 동의어로 본다."
아르헨티나 정치분석가인 카를로스 게르마노가 지난 5월 파이낸셜타임스(FT)에 한 말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IMF를 거론하는 건 곧 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며 IMF는 '금기어(dirty word)'라고 단언했다. FT는 게르마노의 말을 빌려 아르헨티나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소식에 현지인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IMF는 지난 6월 페소화 폭락 사태로 궁지에 몰린 아르헨티나에 500억 달러(약 55조7500억 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페소화 급락세가 진정되지 않자, 지난달 29일 IMF에 구제금융 조기집행을 요청했다. 이 소식에 페소화는 사상 최저치 경신 행진을 거듭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그 사이 기준금리를 60%로 단번에 15%포인트 인상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르헨티나에 뿌리 박힌 'IMF 트라우마'의 깊이를 방증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헨티나가 IMF에 가입한 건 10년 뒤인 1956년의 일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때부터 2006년까지 50년간 38번이나 통화·재정 긴축을 강요하는 IMF 체제를 겪었다. 그 사이 아르헨티나에서는 IMF에 대한 불신이 뿌리를 내렸다. 특히 2001년 디폴트 사태의 후폭풍이 컸다. 5명 가운데 1명이 실업자로 전락했고, 페소화는 가치가 3분의 1로 추락했다. 시위와 약탈 속에 20여명이 숨졌고, 2001년 12월부터 불과 2주 만에 대통령궁 주인이 4번이나 바뀌었다.
전문가들은 IMF가 당시 구제금융으로 페소/달러 고정환율제(페그제)를 떠받친 게 패착이었다고 지적한다. 1990년대 말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 정체, 부채 폭증세로 고전했다. 달러에 환율이 묶인 탓에 페소화를 평가절하해 채무 부담을 줄이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빚을 져야 했다.
핵심은 구제금융 지원 조건이다. 시장의 반감도 재정긴축을 비롯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더 깐깐해질 것이라는 전망에서 비롯됐다. 긴박한 지원일수록 까다로운 조건이 붙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국 재무부 고위관리 출신으로 IMF 미국 대표를 지낸 마크 소벨은 지난 1일 FT에 "그들(IMF)은 더 많은 재정조치와 더 빠듯한 통화정책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IMF가 과거 실패를 교훈 삼아 이번에는 공세 수위를 낮춰야 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에드워드 글로솝 캐피털이코노믹스 신흥시장 담당 이코노미스트는 "IMF는 과거 아르헨티나에 대해 몇몇 실수를 저질렀다"며 "지금이 다른 모습을 보여줄 기회로, 전보다 덜 공격적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리 정부는 IMF보다 더 큰 압력에 직면했다. 페소화 폭락과 하늘을 찌르는 금리로 국민들에게 이미 심각한 고통을 안겨준 데다 내년 10월에는 대선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IMF 악몽'이 재현되면 정치적 반발이 불가피하다.
로이터는 3일 아르헨티나와 IMF의 구제금융 재협상이 마크리 대통령의 대표 정책 가운데 하나로 폐지한 농산물 수출세를 되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통신은 두호브네 장관이 IMF와 재협상을 앞두고 재정적자 감축 목표를 이미 높여 잡았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 현지 매체들은 마크리 대통령 주재로 지난 주말 열린 긴급회의에서 농산물 수출세 부활, 보조금 감축 등이 논의됐다고 전했다.
2001년 위기 때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을 지낸 다니엘 막스는 FT에 "계획이 뭔지 모르지만,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실행가능한 안정의 서곡이 되기를 바란다"며 "그때까지는 페소화 폭락과 아르헨티나 자산에 대한 수요 감소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