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로 보는 세상] 교통사고 하반신마비, 과실 1%라도 치료비 3천만원 지급해야
2018-07-01 09:00
가불금, 책임보험금 제도 등 활용
1. 들어가며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한해 4,292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인구 10만명당 8.5명 꼴이다. 교통사고는 찰나의 순간에 벌어지고 나만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서울 직장인 평균 출퇴근 시간이 약 1시간 30분(2014년 기준, 서울시)인 것을 고려하면, 서울 직장인은 적어도 매일 1시간 30분씩은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된다. 여기에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대수가 약 2,253만대로 인구 2.3명당 1대 꼴로 증가하고 한국인의 급한 기질이 합쳐져 OECD 국가 중 교통사고 사망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 사고 당사자만의 피해로 끝나기 보다는 가족구성원의 정신적, 경제적 고통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피해자 구제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한 영역이다. 뺑소니나 무보험 차량에 의한 사고 시 피해자가 속수무책이 되는 것은 명약관화다. 그런데 실상 피해자가 애를 먹는 대부분은 보험가입된 사고차량의 과실 여부가 불분명하거나 과실 유무를 다투는 경우다.
최근 필자가 다뤘던 사례이다. A씨(70세, 남)는 시장에서 오토바이로 채소를 배달하며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사고 당일도 마찬가지로 왕복 4차선 도로 건너편 식당에 쑥갓을 배달하러 나섰다 택시와 부딪히는 사고로 뇌손상을 입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다툼은 A씨가 신호를 위반하고 좌회전하다 택시와 충돌한데서 비롯되었다. 택시기사는 신호를 준수하였고 A씨가 신호를 위반한 것이니 자신은 과실이 없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였다. 만약 택시기사의 주장이 맞다면 A씨는 거액의 치료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지만 택시기사의 과실이 1%라도 인정된다면 결론은 크게 달라진다.
위 사례처럼 과실 여부나 과실 비율이 확정될 때까지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해 A씨가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보험제도의 존재가 유명무실해 질 수 있다. 사례의 결론부터 밝히면 A씨는 치료비 3천만원, 위자료 5백만원을 인정받았다.
이하에서는 곤란에 빠진 A씨는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공제조합으로부터 치료비를 지급받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2. 보험금 가불 청구
가. 가불금 제도
교통사고로 사망 또는 부상을 당한 경우, 피해자는 가해 차량의 손해배상책임이 확정되기 전이라도 보험회사에 치료비 등을 미리 청구할 수 있다(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제11조). 가불금(假拂金)이라고 한다. 차량 운전자가 과실을 다투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때 유용한 방법이다. 가해 차량이 과실이나 배상액을 다투어 피해 보상이 지연됨으로써 피해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생계가 곤란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다. 가불금 지급을 거부할 경우 보험회사에 2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일단 급한 불을 끄되 차후에 과실이 없거나 초과 지급된 금액이 판명되면 보험회사는 부당이득반환 청구로 돌려받을 수 있다. 만일 가불금을 지급받은 사람이 무자력일 경우라면 국가가 대신 해당금액을 돌려준다.
나. 가불금의 범위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는 치료비(적극손해), 일실수입(소극손해), 위자료(정신적 손해)로 나뉜다. 자동차보험금 또한 이러한 손해를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아직 손해액이 확정되기 전에 지급되는 가불금의 특성상 가불금이 위 손해 중 어디까지 미치는지가 종종 다투어진다.
다. 판례
통상 피해자는 재산상 손해만 지급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고 보험회사는 위자료까지 모두 포함한 금액이라고 대응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보험회사 등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가불금이 피해자에게 발생한 ‘손해액’으로서 지급되는 것이고, 후에 손해배상액이 확정되면 보험회사 등이 ‘지급하여야 할 보험금’에서 기 지급한 가불금을 공제하여 정산할 것을 전제로 하여 가불금이 초과 지급되었을 경우 그 반환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을 뿐, 가불금이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 중 피해자의 재산상 손해에만 한정하여 지급되는 것이라고 볼 만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대법원 2013다42755 판결). 따라서 가불금이 재산상 손해액을 공제하고 남은 금액이 있다면 위자료에 충당된다.
3. 손해액이 진료비에 미치지 못할 경우 책임보험금
가. 손해액 산정과 과실상계
앞서 소개한 사례와 같이 A씨에게도 사고 발생에 과실이 있는 경우(법원은 A씨의 과실을 95%로 보았다), A씨는 치료비 중 상대방의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부분만 배상받을 수 있음이 원칙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A씨가 뇌손상으로 수술을 받고 개호비가 1억원이 들었더라도 A씨는 이중 5%인 500만원만을 배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곤란한 A씨는 사실상 수술이나 치료를 포기해야 할 수 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한 부상자들을 구제하는 방안으로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은 또 하나의 보호수단을 두고 있는데, 바로 치료비 보장제도이다.
나. 손해액과 책임보험금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은 교통사고 시 대인배상을 위해 자동차보유자의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다. 한편, 동법 시행령은 피해자가 지급받을 수 있는 책임보험의 한도 금액을 사망과 부상에 따라 정하고 있다. 이 중 피해자 부상의 경우, 상해 정도에 따라 3천만원에서 50만원까지 각 보험금 한도액에서 치료비를 배상받을 수 있다(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시행령 제3조 제1항 제2호).
그러나, 상기 시행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손해액이 실 진료비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상기 한도금액 범위에서 진료비 전액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상기 제2호 단서).
다. 판례
위 단서 규정에 대해 대법원은 “교통사고 피해자가 입은 손해 중 그의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공제한 손해액이 위 규정의 진료비 해당액에 미달하는 경우에도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자의 치료 보장을 위해 그 진료비 해당액을 손해액으로 보아 이를 책임보험금으로 지급하라는 것”으로 해석하여, “교통사고 피해자로서는 위 교통사고의 발생에 기여한 자신의 과실의 유무나 다과에 불구하고 위 제2호 단서 규정에 의한 진료비 해당액을 구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에 의한 책임보험금으로 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09다57651 판결)
즉, 차량의 과실이 1%만 기여하였더라도 부상자의 과실이 얼마인지와 무관하게 진료비가 책임보험 한도보다 적다면 그 진료비를, 진료비가 책임보험 한도를 초과하면 동 한도금액을 지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급 상해를 입은 A씨는 진료비로 500만원이 아닌 책임한도 금액인 3천만원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된다.
4. 나가며
얼마 전 장애인의 날을 맞아 광화문 광장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 행진이 있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고 장애의 불편과 고통을 어찌 이야기 하겠는가마는 필자에게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하체 불구가 된 이모가 있다. 불편한 몸으로 일생을 힘겹게 지내온 것도 모자라 암과 척추 신경 질환이 찾아 왔지만 병원에 드나드는 것 조차 힘겹다. 이모를 평생 보아온 필자는 감히 장애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공감 할 수 있다.
장애는 선택이 아닌 어쩌다 찾아오는 불운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중상자가 매년 8만 여명에 이르는 현실을 감안하면 교통사고는 후천적 장애를 발생시키는 주범이다.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 할 불운을 안기는 일은 없도록 성숙한 교통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국가도 교통사고 보험 제도를 비롯해 응급실 인프라 지원에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