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칼럼] 미·중 패권다툼과 아편전쟁의 그림자
2018-04-12 18:11
시진핑이 언급한 아편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17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1840년 6월 영국의 전권대사 엘리엇은 육·해군 4000여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둥 앞바다에 도착했다. 세계사에서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불리고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전락시킨 아편전쟁의 시작은 이처럼 수천명의 군대가 등장하는 그런 정도의 규모였다.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은 사실 은(銀) 때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달러에 해당하는 은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바로 아편전쟁이었고 이는 무역전쟁에 다름 아니다. 당시 영국은 국제무역을 주도하면서 은을 결제수단으로 사용했는데 마침 중국은 수백년 동안 국가재정의 운용을 은으로 해왔기 때문에 '은 유동성'이 풍부했다.
지금처럼 지폐를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 없었던 영국은 은을 다량으로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 최강국이었던 청나라는 아편에 속수무책이었다. 아편 결제대금으로 은이 대량 유출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앵거스 메디슨은 한 국가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국내총생산(GDP)을 연도별로 조사했는데 아편전쟁 발발 20년 전인 1820년에 청나라 GDP는 전 세계의 32.96%를 차지했다. 유럽 전체는 22.91% 정도였고 신생 국가 미국은 1.81%에 불과해 유럽과 미국을 합해도 중국과 비교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부국이 아편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편수입이 급증하면서 국민건강이 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은이 대량으로 유출돼 오늘로 치면 위안화에 해당되는 동전값이 급락,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청나라는 영국과 전쟁을 불사했던 것이다.
근래 들어 중국 위안화와 미국 달러화의 기세싸움은 자못 호각지세를 보여주고 있다. 달러화를 찍어 전세계에 뿌려댐으로써 지구적 규모의 달러 인플레를 촉발, 수입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었던 미국은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중국은 산업생산 능력을 높여 실업자를 구제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밀월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1일 해외경제포커스에 실은 '미국 경상수지 동향과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면서 재정수지 적자 확대 전망과 함께 쌍둥이 적자 우려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래가지고는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미국은 비교적 쉽게 금융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아편전쟁 당시로 치자면 미국은 은에 해당되는 달러를 쉽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세계경제에서 문제는 달러가 너무 많이 살포되고 있다는 점이다.
양적완화 정책으로 달러를 전세계에 무차별 살포해온 미국이 이제는 한국과 중국 등에 제2의 플라자 합의를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에는 금융시장 개방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미국의 금융정책에는 엉큼한 구석이 많다. 미국은 예로부터 자국의 위상을 위협해온 나라들에는 '달러 인플레 정책'을 금과옥조처럼 이용해왔다. '달러 인플레'는 바꿔 말해 경쟁국의 자산에 '거품 끼얹기'에 다름 아니다. 80년대의 플라자 합의가 우선 그렇다.
당시 일본은 말 그대로 욱일승천하면서 미국의 위상을 침범할 기미를 보이다 '엔 강세'를 강요당했다. 엔화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일본의 명목 GDP도 덩달아 껑충 뛰어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때 미국보다 1만달러 이상 높아졌고 이에 따라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인들은 미국의 노른자위 자산을 매입하는 등 마음껏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거품의 후유증은 가혹했다.
위안화 등 동아시아 화폐들에 대한 미국의 파상공세는 이 같은 역사적 전철을 참고로 할 때 사실 매우 고약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파생상품이라는 신종 아편을 들고 중국 등을 치고 들어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미국의 이같은 전략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어떠한가. 시진핑 주석은 지난 10일 하이난(海南)성 보아오(博鰲)진에서 열린 보아오포럼 개막 연설에서 금융업 등에 대한 대외 개방을 확대하고 수입도 늘리겠다며 올해 개혁·개방 청사진을 제시했다.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도 금융 리스크를 대상으로 한 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한다고 호언했다. 금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인민일보는 한술 더 떠 "중국은 미국의 공격에 맞서 칼을 빼들었다"면서 "기왕 칼을 빼들었다면 강력히 반격해 미국에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아편전쟁 이전 시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내세운 구호가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것이었다. 이미 중국은 미국을 따라잡아 가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몽'은 아편전쟁의 악몽을 이제 끝장내자는 구호에 다름 아니다.
세계 최강국이었으면서도 열강의 포함(砲艦)에 굴복했던 청나라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국은 지금 첨단 해군력을 키워가고 있다. 문제는 우리 대한민국이 이같은 미·중 패권다툼에 얼마나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전략을 짜고 있느냐이다. 두고 볼 일만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