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⑨] 등장인물 : 윤봉길, 남파 박찬익, 우천 조완구

2018-04-05 18:59

[윤봉길 의사.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임시정부를 살린 항일구국의 영웅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매헌(梅軒).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나서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식민지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한학을 공부했으며, 10대 후반부터는 농촌계몽운동에 나섰다. <농민독본(農民讀本)>라는 교재를 만들어 야학 보급에 애썼으며, 1929년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다음해, 조국독립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향했다. 이때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쓴 편지를 집에 남겼다. 농민운동 지도자인 그를 미행한 왜경에 붙들려 잠시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 다롄(大連), 칭다오(靑島)를 거쳐, 1931년 8월 상해에 도착했다.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게 되어, 그의 소개로 김구를 만나 독립제단에 한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한인애국단에 가담한다.
1932년 4월 29일, 야채상으로 가장한 윤봉길은, 김홍일이 마련한 물통 모양 폭탄(저격용) 1개와 도시락 모양 폭탄(자결용) 1개를 은닉하고,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에 입장해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윤봉길은 그해 12월 19일 25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남파 박찬익.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1884~1949)
서로군 정서 간부, 임시정부의 대중국 교섭창구
경기 파주에서 출생했다.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했으며,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에 한인학교를 설립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간부를 맡아 독립투쟁에 나섰다. 1912년 상해에서, 예관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재상해한인공제회”라고도 하며, 상해로 건너온 동포들의 상호부조를 도모하고 국권회복을 모색한 독립운동단체다.
예관과는 결의형제 사이였으며, 예관이 1909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기술잡지 <공업계>의 발행인을 지냈다. 예관의 밀명을 받아 간도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의정원 의원에 선출됐다.
예관이 사망한 뒤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창구 역할을 도맡았으며, 수당 가족의 망명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0년 법무부장이 되어 중일전쟁의 한 복판에서 임시정부의 중심을 잡았다. 1948년 귀국, 백범의 남북협상을 말렸다고 하며, 다음해 서울에서 병사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기념관에 “공명심을 버리고 조국독립에 무명의 전사가 되자”는 그의 어록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남파 박찬익 전기 간행위원회, <남파 박찬익 전기>, 을유문화사, 1989 참조

 

[우천 조완구.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우천(藕泉) 조완구(趙琬九, 1881~1954)
대종교 구국활동, 임시정부의 대쪽 같은 선비
서울 계동(종로구)에서 태어나, 1902년 한성법학전수학교를 마친 뒤 내부(內部) 주사(主事)에 임명을 받고, 대한제국 관리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관직을 버리고, 국권회복운동을 모색하던 중 1914년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북간도로 망명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회의에 참여했으며, 기미독립선언 직후 이동녕 등과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수립에 나섰다.
중국 망명 기간 내내 백범의 노선을 지지하며 임정을 지켰으며, 재무총장, 국무위원, 내무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가장 용기 있고 올곧은 분으로 꼽혔다고 한다. “수당의 온몸이 담이로다”라며, 그의 밀사행을 극구 칭찬한 바 있다. 백범이 주도한 한국독립당의 핵심 간부였고, 1945년 11월 귀국 때에는 비서부장이었다.
해방 후 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애썼으며, 1948년 백범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 평양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