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 통합이 1차 목표
동쪽 몽골 고원으로 눈을 돌린 갈단은 처음부터 대몽골제국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목표를 몽골 고원의 장악에 둔 것을 보면 그렇다. 갈단은 이미 내몽골 지역이 만주족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을 그냥 묵과할 수가 없었다.
"어찌 몽골인들이 과거 몽골의 명령을 받았던 여진인들의 노예가 되겠는가? 몽골제국은 조상들의 유산이다."
그래서 모든 몽골인들에게 이 같은 점을 강조하며 "몽골의 것은 몽골로 가져오자"고 호소했다. 갈단은 우선 고원을 차지하고 있는 할하 몽골을 장악하고 가능하면 내몽골 지역까지 합류시킴으로써 몽골통합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청, 할하 영주에 자삭 칭호
당시 할하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시간을 다소 앞으로 당겨보자. 1,640년 할하와 오이라트가 동맹을 맺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후 할하는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과 평화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우호 사절단을 계속 파견했다. 1,655년 순치제 12년, 청나라는 할하 우익과 좌익의 영주 4명씩을 뽑아 자삭이라는 직책을 건네줬다.
자삭이라는 칭호는 만주인 특유의 8기제도(八旗制度)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기(旗)마다 해당 목초지가 지정되는데 청나라가 그 기장(旗長)의 지위를 영주에게 보증해준 직책이 자삭이다. 집정관(執政官)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8기 제도는 알려진 대로 청나라 건국의 기초가 되는 만주인의 군사제도인 동시에 행정제도다.
원래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는 북방민족에게는 군사제도가 곧 행정제도인 경우가 많은데 8기 제도는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청나라가 할하의 영주들에게 그런 직위를 내려줄 아무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할하의 영주들을 회유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칭호를 준 것이었다. 자삭으로 지명된 영주에 대해서 청나라는 매년 조공사절을 청나라에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미 청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간 내몽골의 자삭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들을 외번(外藩)자삭이라 불렀다. 할하부가 나중에 외몽골이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몽골이 바로 오늘의 몽골이다.
▶ 할하 좌우익의 분쟁
[사진 = 몽골 동부 소금호수(상긴 달라이)]
할하부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져 있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언급해보자 좌익, 즉 동쪽에 있는 할하가 투시에트 칸 지역이다. 우익, 즉 서쪽에 있는 할하가 자삭투 칸 지역이다. 이 좌우익 할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동쪽 몽골 고원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던 갈단은 바로 이 좌우익 할하 사이의 분쟁을 이용해 몽골 고원을 장악할 기회를 잡게 된다.
좌우익 할하 사이의 분쟁은 갈단이 준가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 분쟁 중 우익주민 좌익으로 이동
청나라가 내린 자삭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 가운데 우익 할하에 에린 칭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할하 영주로 오이라트를 다스렸던 알탄 칸의 후계자로 알탄 칸 3세라고도 불렀던 그 인물이다. 1,662년 바로 이 에린 칭이 할하의 한 영주를 습격해 살해했다. 그렇게 되자 할하 좌익의 투시에트 칸이 에린 칭을 공격하고 나섰다. 에린 칭은 이때 자신의 영지였던 투바라는 곳으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할하 좌익과 준가르 양측으로 공격을 받게 된 그는 결국 1,667년 갈단의 형인 준가르의 셍게에게 붙잡혀 손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당시 갈단은 티베트에서 승려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할하 좌익이 에린 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할하 우익 자삭투 칸부의 많은 주민들이 좌익 투시에트 칸부로 옮겨 간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좌우 할하의 대립을 가져온 결정적 이유가 됐기 때문이었다.
▶ 속민 반환이 좌우익 분쟁의 초점
청나라 강희제 9년인 1,670년, 할하 우익의 자삭투 칸이 교체됐다. 할하 우익이 이를 청나라에게 알리자 청나라는 이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에린 칭이 맡았던 자삭의 자리에 다른 인물을 지명했다. 내부 정리가 됐다고 판단한 할하 우익은 할하 좌익이 에린 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좌익 지역으로 달아났던 속민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할하 좌익은 이미 품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2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돌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할하 좌우익의 분열과 대립이 심화됐다. 몽골 고원의 정세 불안은 청나라에게도 걱정거리였다. 당시 청나라는 흑룡강(黑龍江) 지역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남하를 노리고 있던 러시아와 분쟁 중이었다.
청나라에게 우호적이었던 완충지대 몽골이 자칫 대립과 분열의 와중에서 러시아에게 남하의 빌미를 줄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는 서둘러 달라이 라마 정권과 손을 잡고 공동으로 분쟁 조정에 나섰다.
▶ 갈단, 젭춘담바 행동에 분노
1.686년 할하의 좌우익이 참석하는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는 라싸 간단사의 좌주가 달라이 라마 5세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좌익의 투시에트 칸은 우익 속민의 반환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회담에 참석한 투시에트 칸의 동생 젭춘담바가 간단사 좌주와 같은 윗자리에 앉아 모든 점에서 대등하게 행동했다. 이 점이 갈단을 화나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젭춘담바는 갈단의 전세(前世)인 웬사 투르크의 제자다. 따라서 자신의 제자뻘인 젭춘담바가 자신의 스승인 달라이 라마 5세의 대리인과 감히 대등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활불이자 호교 칸인 갈단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만 해도 할하 침공의 충분한 이유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할하 좌익이 결정적으로 갈단의 침공을 부르는 행위를 보탰다.
▶ 할하 좌익, 우익 칸과 갈단 동생 살해
투시에트 칸이 속민의 절반 밖에 반환하지 않자 자삭투 칸은 갈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준가르로 향했다. 그런데 이를 알아 챈 투시에트 칸이 그들을 추적해 자삭투 칸을 살해하고 준가르군과 교전을 벌여 갈단의 동생까지 살해했다. 갈단의 할하 공격은 불가피한 수순이 됐다. 이듬해인 1,688년, 3만 명에 이르는 갈단의 군대는 항가이산을 넘어 몽골 고원의 할하 유목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