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2] 갈단은 어떤 제국을 꿈꾸었나? ①

2018-02-28 08:51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활불(活佛)로 세속 권한 장악

[사진 = 갈단]

1,670년 형 셍게가 이복형제들에게 살해되자 갈단은 곧바로 나서서 형을 해친 이복형제들을 처단했다. 곧 이어서 숙부인 쵸굴과 그 아들인 사촌 바칸반디와도 싸움을 벌여 여기서도 승리했다. 그 결과 갈단은 준가르 부족들로부터 주군으로 인정받게 이르렀다. 1,671년 달라이 라마는 준가르를 장악한 갈단에게 인장과 옷을 내려주면서 홍타이지 칭호도 함께 내렸다.

준가르의 지도자가 된 갈단은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형 셍게의 부인이었던 호쇼트부 오치르트 칸의 손녀딸 아누다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결혼까지 했으니 갈단은 이제 환속을 한 것이지만 여전히 웬사 투르크의 전생으로 태어난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활불인 상황에서 세속의 권한까지 손에 쥐게 된 셈이었다.

▶ 오이라트 지배권 장악
여기에서 갈단은 우선 오이라트 내부 정리에 나섰다. 1,675년 갈단은 호쇼트부 구시 칸의 후계자인 오치르트 칸과 충돌했다. 그는 갈단의 형 셍게와 이복형제들 사이에 유산 분쟁이 일어났을 때 셍게를 지원했던 인물이다. 갈단의 어머니가 구시 칸의 딸이었고 오치르트 칸의 손녀가 아내였으니 갈단은 구시 칸의 외손자인 동시에 오치르트 칸의 손녀 사위였다.
 

[사진 = 일리(泥濘) 시가지]


하지만 그런 관계와 상관없이 호쇼트부 장악에 나선 갈단은 일리지역 근처에서 오치르트 칸과 대치했다. 여기에서 오치르트 칸이 항복해 포로가 되면서 이 대치는 갈단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오치르트 칸은 포로가 된 채 1,680년 죽었다. 이로써 갈단은 사실상 오이라트의 지배권을 거의 장악했다.

▶ 갈단에게 텐진 보쉬크트 칸 칭호

[사진 = 달라이 라마 5세]

1,678년 겨울,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가 보낸 사자가 갈단을 찾아왔다. 그는 갈단에게 달라이 라마 5세가 내린 텐진 보쉬크트 칸이라는 칭호를 전달했다. 보쉬크는 ‘하늘의 운명, 명령’ 등을 의미한다. ‘텐진’이라는 말은 티베트의 홍교를 제압했던 구시 칸의 칭호에도 붙어 있던 것으로 호교(護敎)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호교란 자신의 신앙이 외부로부터 비판이나 공격을 받는 것을 방어하고 그 진실성을 밝히려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달라이 라마 5세가 내린 칭호대로 갈단은 호교 칸으로서 달라이 라마 정권을 위해 투쟁하는 삶을 보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째든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을 구시 칸과 마찬가지로 황교의 옹호자이자 全오이라트의 칸으로 인정한 것이다. 앞서 달라이 라마가 부여한 홍타이지 칭호는 준가르의 지도자로서의 칭호였다.

하지만 칸의 칭호는 모든 오이라트를 이끄는 맹주라는 의미의 칭호였다. 이제 도르베트와 호쇼트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고 오이라트 지역 안에서 살고 있는 부족 모두가 갈단에게 순순히 복종하게 됐다. 갈단이 오이라트를 통합한 방식은 칭기스칸이 보르기진 씨족의 주도아래 몽골 고원을 통합한 방식과 비슷했다. 이제 오이라트 지역에서 믿을만한 추종자를 대거 확보한 갈단은 다음 수순으로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섰다.

▶ 17세기 위구르, 수피즘 영향권
갈단이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서면서 제일 먼저 손을 댄 부분이 위구르인들이 살고 있는 東투르키스탄 땅이었다. 위구르인들의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몇 차례 언급했지만 굴곡 많은 역사만큼이나 그들의 종교도 변화가 적지 않았다. 샤머니즘과 마니교, 불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이 그들이 시대에 따라 믿어왔던 종교였다.
 

[사진 = 천산 위구르 지역]

17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종교는 이슬람교였다. 그 가운데서도 주로 천산산맥 남쪽에 살고 있던 위구르인들은 당시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 대중 속으로 파고든 수피즘
신앙이 세속화되고 타락하는데 반대하며 그 순수성을 찾으려는 데서 출발한 수피즘은 이슬람교와 접합되면서 속된 이기주의에 대한 정화운동 또는 저항운동으로 발전됐다. 수피즘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그 가운데 신비주의자들이 입고 다닌 양털 옷의 이름에서 파생됐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사진 = 초원의 양떼]

무색의 양모로 만든 털옷을 걸치는 것을 죄를 뉘우치기 위한 행동으로 여긴다는 설명이다.
 

[사진 = 사마르칸드]

수피즘이라는 말 자체도 아랍어의 양털을 가리키는 수프(Suf)에서 파생됐다. 위구르 지역의 수피즘은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등 중앙아시아 중심 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수피즘은 불치병 환자를 치유하고 여러 기적을 만들어내는 등 신비한 능력을 지닌 종교로 알려지면서 일반대중들 속으로 쉽게 파고들었다.

▶ 백산당과 흑산당의 분쟁

[사진 = 카쉬가르 이슬람 사원]

이 종교의 중심지역은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도시 카쉬가르(Kashgar)였다. 그리고 신비주의 교단을 형성했던 가문은 호자(Khojas)라고 불리어지던 집안이었다. 그 지방은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의 자손들이 차지하고 있던 모굴리스탄(Mogulistan) 칸국 영토의 일부였다. 그래서 東차가타이 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굴리스탄이라는 말도 모굴, 즉 '몽골인의 땅'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당시에는 마호메트의 자손을 자처하는 호자 일족이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들어 이슬람 신비주의를 주도하던 호자 가문 안에서 종교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했다. 칸의 자리를 놓고 가문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린 것이 분쟁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가문은 이슬람 신비주의의 취지와는 어긋나게 종교적인 권위를 발판으로 세속적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나선 것이다. 사람들은 호자 가문 안에서 분쟁을 일으킨 두 집단을 백산당(白山黨: 아크 타글릭)과 흑산당(黑山黨:카라 타글릭)이라 불렀다.

▶ "갈단의 침입 부른 백산당의 요청"
두 집단의 분쟁으로 이 지역이 정치적 혼란에 빠진 가운데 양측의 대결에서 흑산당이 승리하고 백산당이 패했다. 그 결과 백산당의 지도자였던 아팍 호자는 동투르크스탄에서 추방돼 중국 땅 서녕(西寧)으로 망명했다. 그는 티베트인이 많이 살고 있는 청해 근처에서 포교활동에 성공해 많은 무슬림 제자를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문헌에서는 분쟁에서 패배한 뒤 망명길에 오른 아팍 호자는 티베트로 달려가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아팍 호자에게 친필 서한을 건네주며 준가르의 지배자 갈단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라는 처방을 내렸다는 것이다.

마침 중앙아시아 지역 장악을 노리고 있던 갈단에게 아팍 호자를 도와주라는 달라이 라마의 서신은 명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 셈이었다. 아팍 호자를 앞세운 갈단은 일만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 지역을 공격해 천산산맥 남쪽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그 결과 위구르인들은 이후 70년 간 준가르의 지배를 받게 됐다는 설명이다.

▶ 불교에 도움 청한 무슬림에 의문

[사진 = 카쉬가르 위구르인]

무슬림이 적대적이기는 하지만 같은 가문 출신의 무슬림을 치기 위해 티베트 불교의 수장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데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래서 이는 흑산당 측이 아팍 호자의 행위를 비난받도록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긴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위구르인들은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팍 호자를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시기인 1,680년, 갈단은 카쉬가르를 점령한 뒤 당시 칸의 일족과 흑산당 소속 인원을 일리지역에 유폐시켰다. 대신 백산당의 아팍 호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다. 이러한 정황이 아팍 호자가 갈단의 힘을 빌어 흑산당을 제압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믿게 만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카쉬가르의 아팍 호자묘소

[사진 = 신강위구르자치구]

카쉬가르는 우루무치에서 버스를 타고 2박 3일을 가야할 정도로 신강의 서쪽 끝 먼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는 중국 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근동(中近東)쪽 분위기에 더 가깝다. 이 도시의 근교에 자리 잡고 있는 아팍 호자의 묘소는 카쉬가르를 찾는 관광객이 거의 빼놓지 않고 들리는 관광명소다.
 

[사진 = 카쉬카르行 철로]

1,640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693년에 완성됐다는 이슬람식 건축물은 높이가 30미터, 둘레가 130미터 정도로 그리 큰 건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묘소에는 17세기 카쉬가르 백산당의 지도자였던 아팍 호자와 그의 아버지와 아들 등 5대에 걸친 72명의 시신이 매장돼 있다.
 

[사진 = 아팍 호자 묘(향비 묘)]

또한 이곳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첩이었던 향비(香妃)가 묻혀 있어서 향비 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향비는 호자가문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아팍 호자의 묘에 들리는 대부분의 위구르인들은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인물이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을 장악하고 위구르의 독립을 잃게 한 장본인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평가가 어떨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갈단의 중앙아시아 정복
아무튼 위구르인들에게는 큰 불행이지만 갈단으로서는 큰 어려움 없이 천산산맥 남쪽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대부분 준가르의 수중에 들어왔다. 카쉬가르 장악에 앞서 이미 하미와 투르판 지역도 점령했으니 위구르인 거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거의 확보한 셈이었다. 여기에서 갈단은 눈을 서쪽과 천산산맥 북쪽 지역으로 돌렸다.

1,681년 이후 갈단은 거의 매년 서방 원정을 감행했다. 이때 갈단의 세력과 부딪친 종족은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인이었다. 1,684년 갈단은 카자흐인들의 지배 근거지인 타쉬겐트와 사이람 두 도시를 점령했다. 당시 카자흐인들은 세 개의 지역집단인 大․中․小오르다(Orda:지역집단)로 분리돼 있었다. 그 가운데 발하쉬호수 주변과 시르다리아강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大오르다와 키르기즈 초원에 근거지를 둔 中오르다는 갈단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사진 = 파미르 고원]

아랄해 북부초원의 小오르다만 남아 있었지만 카자흐왕국은 사실상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685년 갈단은 파미르 고원의 안디잔(Andian)까지 정복했다. 안디잔은 지금 우즈베키스탄 영토로서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는 파미르 분지근처의 도시다.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의 장악한 갈단의 다음 목표는 동쪽 몽골 고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