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의 변방별곡]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에 대비하라
2018-03-01 09:13
아들이 대학에 입학했다. 12년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대학입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입시는 전쟁과 다름없었다.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한시름 놓아서도 안 되는 시대가 됐다. 제2의 입시라는 취업전쟁이 더 치열하기 때문이다. 다시 새로운 취업전쟁을 준비해야겠지만, 그래도 몇 년간은 평화의 시대가 오길 바란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로마의 전략가 베게티우스의 이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를 방증한다. 우리 역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경구로 전쟁을 경계했지만 전쟁 준비를 잘하지 못한, 말뿐인 ‘유비무환’은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고 전쟁을 막지도 못했다. 우리 스스로 이웃나라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는 우리가 ‘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였다. 힘의 논리가 우선시되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선의‘는 없다.
‘한·미동맹’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지 따져보자. 대한민국은 내일이라도 당장 전쟁할 수 있는 나라인가. 지금의 우리 군대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주한미군 없이, 혹은 미국의 핵우산 없이 우리 군 독자적으로 어떠한 적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는가?
군 입대할 연령의 아들이 있는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을 이런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다. 전쟁을 준비하는 강한 군대가 아니라, 그저 자기가 지휘관으로 있는 동안에는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무사안일‘이 판치는 그런 군대에 나 역시 아들을 보내고 싶지 않다. 주적(主敵)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군대에 나는 아들을 보내고 싶지 않다. 주적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민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이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때로 융성한 영화를 누린 적도 없진 않다. 그러나 역사 대부분은 외세의 침략에 늘 우왕좌왕하다가 ‘소를 잃고서도 외양간조차 고칠 엄두도 내지 못한 치욕과 좌절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이웃나라를 공격할 정도의 군사력이나 국력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의 그늘에 기대서 생존하는 법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고, ‘왜구’ 정도로 얕잡아보던 일본이 침략해 오자 중국의 ‘출병’에 목을 맸고 결국 부끄러운 식민의 역사를 생산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그랬고 구한말에 되풀이됐다.
‘사대’(事大)는 군사력이 약한 나라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처세였다. 경제는 세계 7대 강국의 문턱에 다달았으면서 그 경제력으로 군사력을 서서히 갖추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역대 정부는 ‘자주국방‘을 구호로 삼았다.
위기의 근본은 우리가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있고, 더 큰 위기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평화는 구걸해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웠으면서도 하루살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 외에는 보지도, 보려고도 하지도, 믿지도, 믿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취직하지 못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병역의무를 줄여주거나 가상화폐 투자로 대박을 터뜨릴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정부의 본분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물론이고 미래의 희망까지 담보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전쟁이든 화재든 세월호 같은 국가적 재난이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꼼꼼한 점검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준비한다면 비용도 크게 들지 않는다. 그래야 한반도에서 제2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전쟁불사의 각오 없는, 전쟁이 싫다며 총들지 않는 평화는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