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⑧]사이토총독 암살하라, 혜화동서 총 닦는 여자

2018-02-06 13:46
'거사'치를 창덕궁 금호문에서 봤던 송학선, 그의 테러 미수로 발칵 뒤집힌 일본경찰

# 만주생활 7년, 그녀는 무장투쟁가로 바뀌었다

만주로 온지 7년, 1926년 53세의 남자현은 교육자, 종교인에서 독립투쟁 쪽에 더욱 깊이 발을 담근다. 독립운동을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에서 나아가 투쟁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독립군을 치료하는 자모(慈母)의 역할이나, 쪼개져 싸우는 독립진영들의 결속을 다지는 ‘내부화합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직접 일제와 싸우는 투쟁가로 바뀌어갔다.
 

[사진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이 시기의 남자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북 영양군의 유학자 집안 며느리는 이제 당당히 남성들과 함께 스스로의 신념을 실천하는 투쟁요원이 되었다. 촌부(村婦) 시절 그녀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이상룡과 김동삼, 그리고 남편의 동지이던 채찬은 이제 동지로 바뀌었다. 남편의 원통한 죽음에 복수하고, 아버지의 못다한 투쟁의 한을 갚겠다는 개인사(個人史)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시대적 소명감을 깨닫고 보다 큰 가치를 향한 투지를 키워낸 것이다. 

남자현은 만주를 떠나면서 아들 김성삼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오늘 나는 다시 조선에 들어가는데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라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나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나라의 혼을 말살하는 사이토의 목숨을 끊어 조선을 부흥시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요 시대가 원하는 책무이다. 나는 이미 많이 살았으니 죽는 것이 원통할 리도 없다. 다만,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이 일을 해내야 하리라. 너는 이 어미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나는 너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딸이기도 하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고아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살아가거라.”
 

[사진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일본총독 사이토 암살단으로 서울에

1926년 4월 남자현은 길림에서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와 함께, 조선의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사이토는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에 취임하여 식민지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 사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병력을 증가하였으며, 많은 지식인을 변절하게 하였고, 위장된 자치론으로 독립운동 방향에 혼선을 빚도록 했다.

사이토는 부임하면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라.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 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어라. 그러면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고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된다.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남자현은 4월 중순 동지인 김문거에게서 권총을 비롯한 무기를 전달받고,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서울로 잠입한다. 그녀는 동지들과 헤어져 혜화동 28번지 고모(高某)씨 집에 머물면서 교회일을 보며 기회를 노렸다. 박청산이 찾아와 순종이 머물고 있는 창덕궁으로 사이토총독이 자주 드나드니 때를 잡아 저격을 감행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종을 가리켜 ‘창덕궁 폐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진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그해 봄엔 비가 잦았다. 남자현이 밤마다 총을 닦으며 거사 시기를 엿보고 있던 바로 그 무렵, 순종이 승하하는 일이 일어났다. 1926년 4월26일이었다. 창덕궁에 빈소가 마련되었고 호곡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을 타면 활동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게다가 사이토 총독도 조문을 하러올 게 아닌가. 그녀의 거사를 위해, 모든 일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 창덕궁 금호문에서 만난 그 남자

남자현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드나든다는 창덕궁의 서남문인 금호문(金虎門)을 노렸다. 그녀는 현장을 답사하고 그곳으로 사이토가 언제쯤 올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4월 27일 금호문 부근에서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 하나를 보았다. 남루한 행색의 그는 남자현을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녀는 긴장했다. 일본 형사가 아닐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일제가 이미 일을 눈치채고 먼저 경계에 돌입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돌아와 두 동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문득 호각소리가 들리며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경찰들이 혜화동 일대에 쫙 깔렸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리고 집안을 수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급히 뒤로난 샛문으로 빠져나가 인근 교회 건물로 숨어들었다. 어찌된 일일까. 당시로선 상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혜화동 곳곳에서 경계가 삼엄하여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교회의 다락으로 집주인 고씨가 찾아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날 남자현 팀 외에도 사이토총독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훈련된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서울 출신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라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기구가게에서 일을 했던 송학선(宋學善, 1897~1927년)이란 청년이었다. 스물 아홉 살이었던 그는 병이 나 일을 그만 두고 쉬고 있던 상태였다. “아, 금호문에서 만났던 그 사람!” 남자현은 놀라움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 삼엄해진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만주 귀환

송학선 테러 미수 사건으로 서울이 발칵 뒤집혔다. 총독 경찰이 더욱 강화되고, 거동 수상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남자현이 기거하던 집과 그녀가 활동하던 교회에도 낌새를 맡은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피신을 서두르느라 무기를 뜨락 구덩이에 파묻어둘 수 밖에 없었다. 동지 박청산은 경찰에게 미행을 당했다. 간신히 따돌리고 도주했으나 이미 신상착의가 공개된 듯 어디로 가나 추적자가 붙었다.

더 이상 거사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세 사람은, 만주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져 서울을 떴다. 뿌리는 봄비 속에서 남자현은 자신도 모르게 줄줄 흐르는 눈물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총독을 겨누지도 못한 채 살아 돌아가는 일이 문득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