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58] 영락제는 왜 몽골원정에 집착했나? ①

2018-01-30 08:15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조카제거하고 황제자리에

[사진 = 영락제]

홍무제(洪武帝)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영락제(永樂帝)는 명나라 세 번째 황제다. 주원장은 큰아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朱標)가 죽자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다는 뜻에서 장손인 주윤문(朱允炆)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줬다.
 

[사진 = 건문제]

그가 혜제(惠帝) 또는 연호에 따라 건문제(建文帝)로 불리는 두 번째 황제다. 주원장의 아들은 모두 26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 나중에 영락제가 되는 네 번째 주체(朱棣)는 석비(碩妃)가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명나라 때도 공녀 공급이 계속돼 영락제의 어머니 석비 이씨(李氏)가 고려 공녀 출신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락제의 어머니가 누구냐?’ 하는 논란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설로만 전해진다. 주원장이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승려를 붙여 감시하도록 했다. 그렇게 주체에게 감시자로 보내진 승려가 도연(道衍)이다.
 

[사진 = 효릉(주원장 무덤, 남경)]

그는 한 눈에 주체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아보고 그의 책사가 됐다. 참모가 된 도연은 오히려 주체가 보위를 노리도록 부추기기까지 했다. 북평(北平), 즉 과거의 대도이자 지금의 북경 근처 지역을 다스리던 연왕(燕王)으로 있었던 그는 주원장이 죽고 장조카가 보위에 오르자 오랫동안 감춰온 야심을 드러낸다.

조카를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황제가 된 건문제의 측근들은 가장 위험한 인물인 숙부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를 여러 차례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선수를 치고 나선 연왕의 공격으로 3년에 걸친 공방 끝에 수도 남경이 무너지고 만다.

숙부가 군대를 몰고 궁궐로 밀려들자 어린 황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변복을 한 뒤 탈출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건문제는 명나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행적이 사라진 황제가 됐다.

▶수양대군과 영락제
영락제는 자신의 쿠데타를 난을 가라 앉혔다는 의미로 ‘정난(靖難)의 변’이라고 불렀다. 그가 내세운 명분이 황제를 둘러 싼 간신들을 제거한다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미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로 보위에 오른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불만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진 = 수양대군(세조)]

영락제의 등극은 마치 조선시대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를 연상케 한다.
 

[사진 = 장릉(영락제 무덤)]

실제로 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던 수양대군은 신숙주와 함께 영락제의 장릉(長陵)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수양대군은 자신도 영락제처럼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라 치적을 남기면 패륜을 면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대학자 방효유 공개 처형

[사진 = 방효유]

사육신이 세조를 인정하지 않았듯이 당대 명나라의 대학자이자 주원장의 스승인 방효유(方孝孺)도 영락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방효유는 건문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이자 참모였다. 그는 일찍이 건문제에게 숙부 주체를 제거해야한다고 건의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락제는 건문제의 측근 세력을 모두 제거했지만 대학자인 방효유는 살려둬야 한다는 책사 도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방효유는 조서(詔書)를 짓도록 명을 받게 되자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강도질했다’ (연적찬위:燕賊簒位)라고 쓰면서 영락제의 잘못을 질책했다.

격노한 영락제는 “구족을 멸해야 말을 듣겠느냐”고 하자 방효유는 “10족을 멸해도 역적과 손을 잡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문하생 등 모두 8백여 명을 가혹하게 처형하고 10족을 멸했다. 그 것도 한꺼번에 죽인 것이 아니라 방효유의 면전에서 마음을 바꿀 것을 요구하며 한 명 한 명 잔인하게 죽였다.

그래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던 방효유를 공개 처형하고 시신을 저자거리에 내다 걸었다. 아버지 주원장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영락제의 잔인함도 만만치 않았다.

▶자금성 지어 수도 이전
주위의 시선이 따가운 상황에서 영락제는 이를 잠재우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먼저 착수한 일이 나라의 수도를 남경에서 북부의 북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우선 조카 건문제가 살았던 남경이 께름칙한데다 여전히 명나라를 위협하는 몽골의 기습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도 수도이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진 = 자금성]

이를 위해 영락제는 대도성 남쪽에 길이 960m, 폭 750m의 부지를 마련했다. 영락제가 즉위한 지 2년 뒤인 1404년에 시작된 자금성(紫禁城 )건설작업에는 수십만의 농민이 인부로 동원됐다.

이미 폐허가 된 대도성의 남쪽에 남북으로 지어진 자색의 금지된 성은 유목민들의 북쪽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남향으로 지어졌다.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자색은 중국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의 빛깔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태액지의 물을 끌어들이는 등 대도성의 기반 위에 건설돼 유목민들이 남긴 과거 유산의 영향권에서 완전 벗어나지는 못했다.

골조용 목재를 비롯한 자재들도 쿠빌라이가 살려놓은 남북대운하를 통해 공급했다. 무려 1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지금의 북경인 북평으로 옮겨 새 거처에 들어가게 된다. 명나라가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활기찼던 남부지방의 귀족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반면에 은밀하고 독재적인 정치체제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정화함대의 대항해

[사진 = 자금성 누각]

자금성을 짓기로 결정한 다음해인 1405년 영락제는 대규모 선단을 꾸려 바다로 내보낸다. 그해 11월 색목인 환관출신 정화(鄭和)가 이끄는 이른바 정화함대는 소주(蘇州)의 유가항(劉家港)을 떠나 바다로 나갔다. 보선(寶船)62척에 2만 7800명의 병사를 동원한 이 대 항해는 이후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와 서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지역까지 누비게 된다.
 

[사진 = 서양취보선]

방문한 나라만 요즘 기준으로 하면 37개 나라가 된다. 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서양에서 보물을 가져온다)이라 이름 붙여진 선박은 길이 150m에 폭 62m로 8천 톤 규모였다. 여기서 서양은 유럽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서쪽, 그러니까 주로 동남아와 서남아 지역을 의미한다.
 

[사진 = 정화함대(석판)]

당시로서는 대형 선박에 대규모 선단이었다. 1세기 쯤 뒤에 있을 콜럼버스의 항해단은 선박의 크기나 승무원의 규모에 있어 정화함대의 10분에 1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 것만 봐도 그렇다.

▶대규모 함대의 출항 이유는?
영락제는 왜 대규모 함대를 바다로 내보냈을까? 여러 가지 설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어느 하나를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남경 장악 과정에서 흔적이 사라진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진 = 벵골서 명나라에 보낸 기린]

그러나 이 주장에 무게를 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새로 일어선 명나라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하고 동남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조공을 받아 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이 가장 우세하다. 기록 등에 미루어 봐도 이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가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규모 원정단을 바다로 내보냈다고 보는 분석도 있다. 즉 주위의 시선을 해외로 돌리도록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목적이건 영락제가 아버지 주원장이 선언했던 쇄국정책과 해금(海禁)정책을 뒤집고 바다로의 길을 다시 열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로 평가 된다. 몽골제국이 애써 개척해 놓은 바다로의 길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척했다는 것은 역사 발전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진 = 정화함대 항해로]

그래서 정화함대의 대 항해를 지시한 영락제는 쿠빌라이의 후계자처럼 행동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항해 중단, 동양 쇠락의 원인"
이 항해가 교역 등 경제적인 이익을 노린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 보다는 주변 여러 나라에 은혜를 베풀고 동참을 강요하는 사신 행차의 성격이 짙었다. 말하자면 명나라의 중화 질서 구축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항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일곱 차례의 항해 과정에서 정화의 원정단이 취한 행동을 보면 그렇다.

정화함대가 주로 아시아 지역에 중화 질서 구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육지에 집착해 그 것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 바로 명나라의 한계였다. 영락제에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홍희제(洪熙帝:仁宗)는 원정중단의 칙령을 발표하고 바다로의 길을 막았다.
 

[사진 = 정화의 묘(남경 우수산)]

그리고 항해기록과 해도를 없애고 선박까지 파괴하는 쇄국정책을 이어간다. 이 같은 기조는 명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이어진다. 예일대 역사학자 폴 케네디(Paul Kennedy)교수는 그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정화의 탐험이후 중국 명나라에서 단행된 해외 무역과 어업의 금지는 경제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잠재적 동기들을 빼앗아 가 버렸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중국문명을 핵으로 하는 동양이 쇠락하게 되는 큰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정화이후 해양개척이 꾸준히 이루어졌다면 제국주의 시대 동양이 서양에게 유린당하는 역사의 아픔도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명나라가 해양강국의 지위를 잃고 대륙에 묶여 있는 한정된 국가로 살아가는 선택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중국 대륙을 위협하는 몽골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락제가 몽골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도 중국에게 가장 골칫거리인 몽골을 완전 제압함으로서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 민심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자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