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7] 고려왕은 어떤 위치에 있었나?

2018-01-18 08:16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왕실간의 통혼-부마국의 출발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중국 땅의 대원제국이 무너졌다. 초원으로 돌아간 그들의 삶은 어떻게 펼쳐질까? 잠시 그 얘기를 접어두자. 몽골의 부마국으로 살아간 고려의 얘기를 먼저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충(忠)자 달린 왕의 시대로 대변되는 백년 가까운 역사는 어둠의 세월이었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는 것은 쿠빌라이와 태자 왕전의 만남이 그 출발점이었다. 태자 왕전은 바로 쿠빌라이의 지원 아래 왕에 오른 원종(元宗)이다.

[사진 = 시집가는 신부행렬 (샤라브작 ‘몽골의 하루’中)]

1269년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자 쿠빌라이는 여기에 적극 개입해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를 계기로 1274년 태자 왕심(王諶)과 쿠빌라이의 친딸 쿠틀룩 켈리미시(忽都魯揭里米失)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졌다. 그해 원종이 죽으면서 왕심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충렬왕이다. 또 충렬왕과 혼인한 쿠빌라이의 딸은 제국대장공주가 됐다.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간의 통혼은 양자 관계를 가족관계라는 확실한 끈으로 엮어주는 계기가 됐다.

▶ 세 가지 직책 가진 고려왕

[사진 = 충렬왕]

충렬왕은 고려의 국왕인 동시에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됐다. 이와 함께 1280년 일본정벌을 위해 정동행성이 설치되면서 충렬왕은 몽골로부터 정동행성 승상에 임명됐다. 이후 고려 국왕의 위호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동행성승상(征東行省丞相), 부마(駙馬), 고려국왕(高麗國王)이 됐다.

그러니까 고려의 국왕은 세 가지 지위를 가졌다고 보면 된다. 이 세 가지 지위가 바로 고려와 몽골간의 기본 틀이 됐다. 그러니까 고려의 국왕은 몽골제국 외부에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가진 군주인 동시에 칭기스칸 가문의 부마로서 몽골제국 안에 존재하는 왕이었다. 정동행성 승상이라는 자리도 결국 몽골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몽골제국 안에 속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려 국왕의 지위는 곧바로 고려의 정치적 위상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고려가 몽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14세기 중반까지 계속 됐다. 여기서 충자 달린 여섯 명의 고려왕 시대의 역사는 고려사에 맡기자. 대신 특이한 삶을 산 충선왕의 치세를 통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짚어보도록 하자. 충선왕의 세자 시절 사랑 얘기를 담은 드라마가 지난해 TV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 굴곡이 많은 삶을 산 충선왕

[사진 = 충선왕]

고려 스물여섯 번째 왕인 충선왕(忠宣王)은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고려 땅에 묻혔다. 당시 고려의 수도 개성에 묻힌 그의 능은 덕릉(德陵)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의 능이 정확히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북한 땅에 있어 확인이 더욱 어렵다.

고려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원나라가 지배했던 중국 땅에서 보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비정상적인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밀려난 뒤 다시 왕의 자리를 되찾기도 했다. 또 왕의 자리를 스스로 내 놓은 뒤 대도에서 지내다가 먼 티베트 땅으로 유배를 가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굴곡이 많은 그의 삶 속에서 당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 몽골 간접지배 1세기
충선왕(忠宣王)은 고려가 몽골에게 정복된 뒤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왕의 이름 앞에 충(忠)자를 붙인 두 번째 왕이다. 몽골은 충렬왕 때부터 왕의 시호이름 앞에 충(忠)자를 붙이도록 강요해 이후 여섯 명의 고려왕에게 충자가 붙었다. 또 묘호에도 조(祖)나 종(宗)대신 왕을 붙이도록 요구했다. 그 앞쪽에 있는 원종 때는 고려가 몽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 시기였다.

또 그 뒤쪽에 있는 공민왕 때는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때다. 그래서 고려가 몽골제국의 입김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확실한 기간은 충렬왕(忠烈王)에서 충정왕(忠定王)에 이르는 80년 동안으로 볼 수 있다. 앞 뒤 세월의 영향권에 있었던 시기까지 감안하면 100년 전후, 그러니까 1세기 동안 고려는 몽골제국의 간접지배아래 있었다. 그 가운데 충선왕은 가장 주목해볼 만한 사람이다.
 

[표 = 몽골 영향권 고려왕 재위기간]

▶ 고려왕과 몽골공주 사이서 출생
충선왕은 절반의 고려 피와 절반의 몽골 피가 섞인 인물이다. 몽골이 초원으로 쫓겨 간 뒤 북원제국 대칸의 자리에 오른 아유시리다라는 몽골인 아버지인 대칸토곤 테무르와 고려인 어머니 기왕후(奇王侯)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충선왕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가 뒤바뀐 경우로 어머니는 대칸 쿠빌라이의 딸이고 아버지는 충렬왕(忠烈王)이다.

충선왕의 어머니의 몽골이름은 ‘쿠틀룩 켈리미쉬’라고 부른다. 하지만 복잡하고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려 쪽에서 붙인 대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장목왕후라 부르자. 충선왕의 몽골식 이름은 이질부카다. 3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 그는 고려에 대한 인질 성격으로 어릴 때부터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서 보내졌다.

▶ 몽골공주와 대도서 혼인

[사진 = 몽골의 결혼의식]

아버지 충렬왕 때부터 고려가 부마국(夫馬國)이 된 전례에 따라 그도 1296년 대도에서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 그녀의 몽골인 부인은 계국대장공주로 진왕 카말라의 딸 보다시리다. 공주라고는 하지만 대칸의 딸은 아니다. 몽골의 황제는 적지 않은 몽골황족에게 지방을 맡겨 왕의 칭호를 줬기 때문에 그녀도 그 왕들 중 한 사람의 딸로 공주라고 부를 뿐이다.

연왕(燕王), 안서왕(安西王,) 북평왕(北平王)등이 쿠빌라이가 자손들에게 내려준 왕의 칭호다. 진왕 카말라는 바로 연왕이었다가 황태자가 되는 쿠빌라이의 큰 아들 칭킴의 큰아들, 그러니까 쿠빌라이에게는 장손이 되는 인물이었다. 카말라는 쿠빌라이가 죽은 뒤 후계자로 거론된 두 명의 손자 가운데 한사람이었지만 동생 테무르가 대칸이 되자 케룰렌 강변의 몽골 초원으로 들어갔다.
 

[사진 = 이순 테무르(太定帝)]

나중에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이순 테무르(太定帝)가 바로 카말라의 아들이니 이순 테무르와 계국대장공주는 남매간이다. 실제 대칸의 딸이 고려의 왕후가 된 것은 충선왕의 어머니, 즉 충렬왕의 부인 한사람뿐이다. 그래도 충선왕의 부인이 된 보다시리는 대칸과 3촌 사이로 비교적 가까운 사이지만 이후의 고려왕의 부인이 되는 공주들은 모두 대칸과 4촌에서 8촌에 이를 정도로 혈연관계가 멀어진다.

▶ 夫婦갈등에서 父子갈등으로

[사진 = 무비 추정도]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과 어머니 제국대장공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충렬왕은 궁인 무비(無比)를 총애하게 되면서 그녀의 측근들과 어울려 지냈다. 비교할 것이 없다는 이름이 말해주듯 그녀는 뛰어난 미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충렬왕은 몽골에서 배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고를 탕진했다. 게다가 궁인 무비는 왕의 총애를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며 횡포를 부렸다. 자연히 충렬왕과 장목왕후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충렬왕과 어머니의 편이었던 세자 원(謜:충선왕) 사이의 알력도 높아졌다. 몽골 조정은 당연히 왕후 편을 들었다.
 

[사진 = 대도성]

대칸이었던 쿠빌라이도 자신의 딸을 홀대하는 충렬왕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제국대장공주가 1297년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장례식 참석을 계기로 고려로 돌아온 세자 원(謜:충선왕)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시하고 주위 인물들을 대거 제거해 버렸다. 그는 아버지가 총애하는 궁인 무비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청소작업을 한 뒤 다시 대도로 돌아갔다.

부부간의 갈등이 이제 부자간의 갈등으로 옮겨졌다. 이에 정치염증을 느낀 충렬왕은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모양은 그랬지만 사실은 충렬왕 스스로 힘이 약해진 것을 깨닫고 물러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몽골조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를 귀국시켜 충렬왕 대신 왕위에 오르게 했다.

▶ 힘 잃은 충렬왕, 왕위서 물러나
충렬왕이 스스로 왕에서 물러나고 충선왕이 힘이 강해진 것은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하면서 몽골의 힘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장목왕후가 숨지면서 기댈 언덕이 거의 없어졌다. 더욱이 충렬왕과 장목왕후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원나라 조정이 알고 있던 상황이라 왕권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충선왕은 이제 막 카말라의 딸과 결혼해 몽골황실의 부마가 된 상황이라 그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간파한 충렬왕은 스스로 힘이 약해진 것을 깨닫고 왕위에서 물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