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무술년, 북핵 통변술을 경계한다

2017-12-28 20:00

[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무술년, 북핵 통변술을 경계한다

비관적인 얘기부터 해보자. 무술년, 북핵 게임의 승자는 트럼프일까, 김정은일까. 두 사람이 다 승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왜? 북핵문제는 이미 통변술(通辯術)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통변술이 뭔가. 역술인들이 사용하는 사람의 운세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의 사주를 봤더니 머지않아 죽거나 크게 아플 것으로 나왔다. 그렇다고 역술인이 이를 그대로 말하기는 어렵다. 당사자의 충격이 좀 크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렇게 에둘러 말한다. “건강에 주의하세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풍경이다.

통변술이 가장 자주 쓰이는 곳이 외교다. 십수년 전, 필자가 신참기자로 외교부를 출입했을 때 당시 A장관이 귀띔해준 얘기다. 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대변인이 “양국 정상은 현안에 대해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면, 이건 그 회담에서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는 뜻이다. 유능한 외교관은 1시간 넘게 기자회견을 해도 뒤돌아서면 한 줄도 쓸 게 없다. 최호중, 이상옥, 공노명, 유종하, 반기문 등 역대 장관이 다 그랬다. 이들 모두 좋은 의미에서 통변술의 대가였던 셈이다.

북핵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봉합’으로 갈 확률이 높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제공격을 하고 싶어도 2500만 북한 주민의 2배가 넘는 5000만 남한 인구가 핵공격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선 상상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 미·중 간의 확전으로 동북아 전체가 전화(戰火)에 휘말릴 수도 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비극을 원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전쟁 불가’ 원칙을 못 박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북핵을 용인할 수도 없다.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가 헤집고 들어갈 공간은 사라져 버린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리도 없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은 없다고 언명한 지 오래다. 결국 양측이 한 발씩 물러설 수밖에 없다. 북한은 더는 핵·미사일 도발을 안 하고, 미국은 제재를 완화하는 선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진보 좌파가 그동안 줄기차게 제안한 ‘해법’이다.

미국은 이미 북한을 향해 “2개월만 도발을 중단하면 대화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본다”는 이른바 ‘틸러슨 플랜’을 밝힌 상태다. 문 대통령도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위해 연례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하자고 미측에 제안해 놓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대화의 테이블은 불원간 마련될 것으로 봐야 한다. 설령 그 대화가 문제의 근원적 해결보다는 미봉의 시작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미국의 CIA가 북한의 핵능력 완성시한을 3개월로 보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3개월 후엔 오히려 북한이 자신감을 갖고 대화 공세로 나올 수도 있다.

통변술의 유희(遊戲)는 이때쯤 시작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북핵과 미사일 위협의 실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대화와 평화를 얘기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진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는 자신의 리더십에 의해 북핵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가 주장한 ‘최대의 압박과 관여’의 전략이 통했다는 식이다. 북한은 핵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한껏 과시한다. 핵을 가진 채 미국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핵 무력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양측이 모두 승자의 미소를 띠고 대화의 테이블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이름하여 ‘평화적·외교적 해결’.

언어가 실질을 앞서거나 포장함으로써 국면을 전환시키는-엄밀히 말하면 공포를 축소하고 고통을 잠시 미루는-일종의 통변술이다. 진보 측은 쾌재를 부를 터이다. ‘대화의 승리’이며, 문 대통령이 다시 한반도의 운전석에 앉게 됐다고 의미 부여를 할 것이다. 이게 ‘봉합’이지 무슨 ‘해결’이냐고 하면 이런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비핵화는 긴 과정이어서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북·미 양측은 이제 첫발을 뗐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은 것만 해도 큰 성과다.” 중국인들 환호를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신들이 그토록 주장하던 쌍중단(북의 도발과 한·미 군사훈련의 동시 중단), 쌍궤병행(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와 북·미 평화협정 동시 추진)의 방향으로 레일이 깔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베이징)에서 미국의 대북(對北) 불가침 약속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맞바꾸는 요지의 9·19 합의가 채택됐다. 물론 선언에 그쳤다. 그마저도 곧 폐기됐다. 하지만 당시 우리 측 회담 대표들은 “한국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자찬했다. 2007년 2월 제5차 회담에서도 북한의 핵시설 폐쇄와 테러지원국 해제를 맞바꾸는 2·13 합의가 채택됐으나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새해, 북핵문제가 이렇게 풀릴까봐 걱정이다. ‘동결’ 정도로 만족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온 나라가 비핵화에 매달려온 게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북한이 이미 개발해 보유한 핵물질까지 포함해 모든 핵 자산을 되돌릴 수 없도록 폐기하는 것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 사찰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게 문제 해결의 본질이고 본모습이어야 한다. 통변술로 대충 넘어갈 사안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