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7] 노구교는 왜 마르크 폴로 다리가 됐나?
2017-12-19 09:01
중일전쟁의 발발지로도 잘 알려진 이 다리는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 폴로 다리’가 그 것이다. 쿠빌라이시대 몽골제국을 방문했던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당시 대칸이 사는 도시 대도, 즉 칸발릭(Khanbalik)으로 들어서면서 이 다리를 지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강에는 멋있는 다리가 걸려 있다. 아마 세계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일 것이다."
▶ 바닥 드러낸 영정하
남북교통의 요충지로 나루터가 번창했던 영정하는 이제 북경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건설작업에 필요한 모래의 주 공급처로 그 역할이 바뀌고 있었다. 노구교는 말라버린 영정하 위를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현재 노구교는 문화재적인 가치 이외에 다리 양편에 있는 두 마을 사람들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오고 가도록 연결시켜주는 주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의 노구교는 다리 중앙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북경당국은 돌로 만들어진 노구교의 남아 있는 부분을 다리 중앙에 옮겨놓고 그 주위에 새로운 시멘트 다리를 이어 현재의 다리 모양을 갖춰 놓았다. 원래의 노구교가 시작되는 부분에는 "1986년 11월에 일부 보수공사를 시작해 1987년 7월에 준공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 다리는 1192년 금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다리는 북경 근처에 존재하는 석조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영궁 석교로 7백 년 전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유럽에 소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길이 266.5m에 폭이 7.3m인 이 다리는 11개의 아치와 500여개의 사자 석상을 다리 난간에 가지고 있으며 이 사자석상은 금나라와 원, 명, 청대에 계속적으로 만들어졌다."
▶ 수를 알 수 없는 돌사자
▶ 중일전쟁 발발지 노구교
1937년 7월 7일, 한밤중에 노구교 근처에서 울린 총성이 노구교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세계에 알렸다. 그 총성은 결과적으로 중일전쟁의 신호탄이 됐기 때문이었다. 노구교사건에 대한 과정은 일본 측과 중국 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하지만 당시 중국 대륙을 공략하던 일본이 한해 전에 있었던 서안(西安)사건 이후 형성된 국공합작 분위기를 깨지 못해 탈출구를 찾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이 중국 공격을 위한 핑계로 활용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서안사건이란 1936년 중국 동북군 사령관인 장학량(張學良)이 서안비행장에서 장개석 국민당 총통을 감금하고 항일전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강요한 사건을 말한다.
▶ 일, 중국 공격의 빌미로 활용
다음날인 7월 8일 일본군은 노구교 옆 마을을 점령했다. 당시 10여 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자작극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중국 측의 양보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꼬투리를 찾고 있던 일본은 이 기회를 무산시키려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계속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군대를 증파해 7월 28일 북경과 천진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 국공합작 항일전선 구축의 계기
이를 계기로 양측의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산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나중에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며 8년간이나 계속된 이 전쟁으로 희생된 전쟁사망자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될 정도로 많은 피해를 남겼다. 하지만 일본의 공격은 그 동안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본격적인 국공합작에 나서서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차지할 기회까지 만들었으니 중국인들에게 노구교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노구교는 중국과 일본의 과거사를 거론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곳이 됐다.
▶ 다리 소개 마르코폴로, 다리 이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