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슬픈 계명(啓明)

2017-12-07 06:00

[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어둠은 어둠에 묻힌다. 빛은 더 밝은 빛에 빛을 잃는다. 뭇별은 달에 가리고, 홀로 우뚝 빛나는 금성(金星)은 동이 트며 스러진다. 밤하늘의 황태자는 새벽이 슬프다.

금성은 기구한 숙명이다. 조석으로 이름마저 바뀐다. 먼동이 트기 전 동쪽 하늘에 반짝이면 샛별이다. 새벽을 밝히는 새로 나온 별이라는 뜻이다. 반면 해가 진 뒤 서쪽 하늘에 반짝이면 ‘개밥바라기’이다. 개의 밥그릇이란 뜻이다. 밤새 경계하는 개에게 밥을 줄 때이다.

별칭도 많다. 시경(詩經)에 “동쪽엔 계명(啓明), 서쪽엔 장경(長庚)”이란 표현이 보인다. 계명은 샛별, 장경성은 개밥바라기를 가리킨다. 새벽 닭이 울 때 뜨는 별로서 계명(鷄鳴)으로 아는 이도 있지만, 본디 ‘밝음을 연다’는 뜻이다. 계몽(啓蒙)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대구의 유서 깊은 계명대학교가 바로 ‘샛별대학교’이다.
 
장경(長庚)의 경(庚)은 개와 관련이 깊다. 한여름 삼복(三伏)의 기준이 60갑자 가운데 경일(庚日)이다. 초복은 하지(夏至)에서 첫 번째, 중복은 네 번째, 말복은 입추(立秋) 전 첫 번째 경일이다. 개밥바라기란 이름은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금성은 태백성, 어둠별, 명성으로도 불린다. 다양한 불림에 선조들의 고단한 일상이 묻어 있다. 샛별을 보며 쇠죽 끓이고 논밭에 나갔다가 개밥바라기 뜨면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샛별은 또 하나의 하루를 여는 ‘알람’이요, 개밥바라기는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별”이다. ‘새벽 별 보기 운동’ 역시 고달픈 일상의 현대판이다.

영어권도 마찬가지이다. 황금빛 아름다운 금성은 미(美)의 여신 '비너스(Venus)'이다. 샛별은 아침 별이니 '모닝 스타(morning star)', 개밥바라기는 저녁 별이니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이다. 샛별은 '루시퍼(Lucifer)'로도 부르는데, 본디 ‘횃불 운반자’라는 뜻이다. 깊은 어둠으로부터 밝은 태양을 이끌고 온다고 봤다. 계명(啓明)과도 뜻이 통한다. 한데 기독교인들에게는 사탄 중의 사탄, 악마의 이름이다.

성서적으로 보면 사탄은 원래 천사였다가 신(神)의 눈에 벗어나 천국에서 추방됐다. 너무 높은 권좌까지 오르려 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 여명(黎明)에 빛나는 샛별을 떠올리면 신화적 관념이 이해가 된다. 

구약성서 이사야서(14:12)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구덩이 맨 아래 떨어짐을 당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바빌론의 왕을 저주한 것이다. 또 고린도후서(11:14)에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란 구절도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 루시퍼는 감히 성스러운 절대 신의 권좌를 넘본 오만함 때문에 천사에서 악마(사탄)가 됐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테의 '신곡(神曲)'에서 루시퍼는 지옥의 지배자로 나온다. 유황불로 죄인을 태우는 끔찍한 지옥의 수장이다. 최초의 성냥을 루시퍼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성냥을 그으면 화약에 섞인 유황이 타면서 지독한 냄새가 났는데, 루시퍼의 지옥을 비유한 것이다.

어쩌면 샛별의 원초적 슬픔은 뒤따라 오는 태양 때문일 것이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 곧 솟아오를 태양을 예고하지만, 자신은 결국 태양에 사위어질 운명인 것이다. 신화적 슬픔은 태양 다음으로 밝은 별이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그렇듯이 태양도 질투심이 강한 것일까. 달은 절묘한 숨바꼭질로 태양의 눈을 피한다.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면 동쪽 하늘에 살며시 나타났다가, 동쪽 하늘을 밝히면 서산 너머로 숨는 것이다. 태양의 눈에는 달이 아니라 샛별이 자신의 위상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루스(Icarus)와도 닮았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붙이고 하늘 높이 날았던 이카루스는 태양열에 밀랍이 녹으며 에게해로 추락한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깝게 올랐다가 추락사했고, 루시퍼는 태양에 앞서 동쪽 하늘을 밝혔다가 사탄으로 쫓겨났다.

인간사도 그러한가. 무리에서 우뚝 빛나는 자는 늘 평가가 상반된다. 태양(지도자)도 한때 자신에 앞서 새 시대를 밝힐, 꽃 길을 닦을 샛별(추종자)이 기특했다. 하지만 수평선 위로 떠올라 어둠이 스러지면, 꽃가마에 올라 타면 더는 샛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빛을 바래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사의 계절이다. 사냥개는 삶기고 강한 활은 처박힌다. 오랜 꽃이 진 자리에 춘란이 핀다. 꽃이 지는데 바람을 탓하는 소리도 요란하다. 샛별이 물러난 자리에서 그믐달 자취에도 빛을 잃는 뭇별들이 아우성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