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1] 강화도는 천혜(天惠)의 요새인가?

2017-12-02 10:50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강화도(江華島)에서 34년간 항전

[사진 = 강화해협(염하)]

한반도 배꼽부위에 해당하는 지점에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섬 강화! 이곳에서 바라다보면 육지는 정말 지척(咫尺)에 있다. 마치 육지였다가 좁은 바닷길이 나면서 섬으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곳이 강화다. 하지만 염하(鹽河)라고 부르는 폭 1Km도 채 되지 않는 이 강화해협은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군도 어쩌지 못하고 무려 30년 이상 발을 구르도록 만들었다고 알려진 천연 장애물이었다.

바다지만 마치 강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염하로 불렀던 이 해협은 좁은 곳은 200-300m, 제일 넓은 곳이 1Km정도 된다. 최대 유속은 약 3.5m/sec 정도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다. 고려가 몽골의 침공을 피해 강화로 천도(遷都)한 것은 1236년 7월, 2백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는 이후 천연의 요새인 강화에 머물면서 34년간 몽골에 대항했다.

▶ 천연 장애물 손돌목 급류

[사진 = 광성보 안내판]

강화도는 한강과 예성강 그리고 임진강 등 세 개의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개성(開城)과 개풍(開豊)이 있고 서쪽으로는 한강입구에 문수산성(文殊山城)이 자리 잡고 있다. 문수산성 아래에 있는 통진(通津)나루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뱃길의 출발점이다.
 

[사진 = 손돌목 급류 지역]

그러나 지금의 광성보(廣城堡) 근처 강화해협에는 손돌목(孫乭項)의 급류가 가로막고 있어 비록 짧은 거리지만 배가 지나기가 쉽지 않다.

한강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배들이 이 좁은 수로를 통과해야 하지만 물때와 바람 방향을 맞추지 못하면 이곳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돌목 앞에 대기해야만 한다. 특히 손돌목의 바닥은 바위 층이고 돌부리가 많기 때문에 바람이 심하게 불면 배들이 암초에 부딪쳐 난파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로 양편에서 포격을 한다면 배가 이 지점을 지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사진 = 손돌목 돈대]

강화도에 돈대가 설치되는 등 조선후기까지도 중요한 요새가 됐고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그리고 운양호(雲揚號)사건 등이 모두 강화에서 일어난 이유도 그 때문이다.

▶ 급류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손돌
급한 조류가 이는 지점의 이름이 손돌목이라 불려 지게 된 연유도 몽골의 고려 침공과 관련해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화로 피난가게 된 고려왕 고종이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배를 타게 됐는데 배가 광성진 근처에 이르자 물살이 거세어지면서 심하게 요동을 쳤다.

피신 길에 있는 왕인지라 의심이 많아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한다고 생각하고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손돌은 지형이 원래 그런 곳이라며 하소연했지만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손돌을 처형했다. 죽음을 당하기 전에 손돌은 바가지를 하나 건네면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가 가는 대로 따라가면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왕도 별수 없이 그의 말에 따랐고 그 결과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강화도에 도착하자마자 회오리바람이 불자 왕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강화 사람들은 광성진 앞 수로를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해서 손돌목이라 부르게 됐다.
 

[사진 = 손돌의 묘(덕진포)]

또 10월의 차가운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부르면서 덕포진에 있는 손돌의 묘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것이 7월이라 10월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은 점이 있지만 어쨌든 강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다.

▶ 천도 후 방어진지 구축
고려는 몽골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약점을 최대한 활용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다가올 침략에 대비했다. 우선 43리(里)에 이르는 외성을 흙으로 쌓고 내성 안에는 궁궐을 지어 장기전에 대비했다. 육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는 북문을 설치하고 바다 쪽에는 서문을 세웠다.

강화는 섬이면서도 분지형태를 취하고 있어 군사적 방어진지로서도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해안가는 거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은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방어 진지로서는 더 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 육지로 연결된 섬

[사진 = 강화대교]

지난 1970년, 육지와 섬을 잇는 길이 693미터의 강화대교(江華大橋)가 개통됐다. 또 2002년에는 강화의 초지리(草芝里)와 김포의 약암리(藥岩里)를 잇는 길이 1.2Km의 4차선 아치형 초지대교(草芝大橋)가 세워졌다. 이 다리들의 개통과 함께 강화는 섬이라기보다는 육지나 마찬가지가 돼버렸다.
 

[사진 = 강화 축성(미니어쳐)]

그러나 여전히 좁은 해협을 배를 타고 지나기가 만만치 않을 만큼 조류가 예사롭지 않다. 강화 주변의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조류가 빨라서 눈에 보이는 거리지만 가로지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강화 주민들의 얘기다. 과거의 범선은 이곳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엔진이 달린 요즘의 동력선은 통과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급한 조류가 일기 때문에 요즘에도 이곳은 수중 침투를 위한 군사 훈련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 이규보, 육지 쪽 몽골군 조롱

[사진 = 이규보 초상화]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이물을 뛰어 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진을 치고 시위만 한 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말하겠는가?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고려의 이름난 문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의 시다. 좁은 바다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맞은 편 육지에 나타나 위협적인 시위를 벌이며 섬에서 나올 것을 종용하는 몽골군의 모습을 조롱하고 있다.
 

[사진 = 이규보 묘소(강화 길상면)]

이규보는 원래 여주 태생이지만 그의 묘가 강화에 있어 강화 사람들은 이규보를 강화의 인물로 치고 있다. 그 이규보도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몽골군들을 조롱할 정도로 강화도가 방어를 위한 요새로서 뛰어난 곳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 몽골, 강화 공략 못한 이유는?
강화도가 이처럼 건너기 어려운 수로를 앞에 두고 있고 전략적으로 이점을 지닌 군사 요충지라는 점을 인정 할만하다. 그래도 단지 그 때문에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군이 30여 년 동안 강화도를 공략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딘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것도 이유가 되기는 했겠지만 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사진 = 해변의 몽골말]

몽골군이 초원에서 사는 유목민들이어서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몽골은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강화 해협보다 더 넓고 긴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었다. 비록 전투에서 고전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대부분 그 난관을 극복하고 상대를 제압했다. 쿠빌라이가 남송 공격과정에서 장강을 건너는 병사들에게 부적을 붙이게 한 것이나 주력부대를 몽골인이 아닌 다른 피(被)정복민들을 편성한 것 등은 바로 물의 벽을 넘기 위해 취한 방안들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자(垓子)로 둘러싸인 성을 공격하기 위해 말가죽에다 공기를 불어넣은 뒤 길게 이어 부교를 만드는 기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지닌 몽골이 전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완전 접수하겠다는 마음만 먹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물의 벽’ 넘는 공격 가능했을 듯

[사진 = 강화도 돈대]

강화와 육지 사이를 가르는 염하가 물살이 빠르기 때문에 배를 타고 건너기가 어렵고 더욱이 높은 곳에 있는 토성에서 바다 쪽을 공격한다면 접근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에 대한 침공보다 시기적으로 몇 년 늦게 추진된 남송의 양양과 번성 공략 작전을 보면 그 해답이 엿보인다. 우선 양양과 번성 전투의 승패를 가른 투석기 회회포를 강화 전투에 활용했다면 강화도는 더 이상 버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수로가 2-3백m 정도로 폭이 좁은 곳을 골라 배에다 회회포를 싣고 조금만 섬 쪽으로 접근해 집중 공격을 했다면 섬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도 방어벽으로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사거리가 5백 미터가 넘는 투석기는 아마도 토성을 넘어 그 안쪽에 돌멩이 세례를 퍼부었을 것이다. 남송의 여문환이 견디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던 것처럼 고려 조정도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몽골군은 전혀 그런 방법을 동원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또 중국의 한인(漢人)들을 수전에 활용하거나 포로로 잡은 육지 고려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할 수도 있었을 터지만 그 방법 역시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 오랜 세월을 대치하는 동안 몽골은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친 적이 없었다. 물론 육지의 고려 땅은 그 동안 몽골군에게 철저히 유린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고려의 조정과는 지루한 대치상태만 이어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몽골이 고려와의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어가면서 강화도를 점령하지 않거나 점령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42년간에 걸친 고려와 몽골간의 전쟁을 살펴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고려와의 몽골간의 전쟁 과정은 우리 역사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자료를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지만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훑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