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11-19 14:49
차일혁, 무주 구천동에서 첫 패배를 당하다
이에 따라 제18전투경찰대대 1중대와 2중대는 중화기 1개 소대씩 배속 받아 설천면 두길리를 거쳐 거칠봉을 경유하여 심곡리로 진격했고, 제17전투경찰대대 1개 증대와 중화기 1개 소대는 무주경찰서 의용경찰대 1백여 명과 함께 안성면에서 새재를 넘어 심곡리로 이동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의 특별기동대인 경사대(소대), 돌격대(소대)는 무풍 지서주임이 인솔하는 의경(義警) 50명과 함께 무풍면에서 현내리를 경유하여 제2덕유산 능선을 타고 심곡리로 전진했다. 무주경찰서 부대는 김해산을 경유 구천동으로 수색을 하며 들어갔다.
차일혁은 거칠봉 기슭에 임시본부를 설치한 후, “적의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고지를 점령하고, 중화기는 고지에 설치한 다음 마을로 내려가 정찰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 이병선(李炳善) 대대장의 지휘 하에 진격하던 김진구 중대와 중화기 소대, 그리고 무주경찰서 의용경찰대 약 2백 명은 1중대 1소대를 앞세우고 험준한 거칠봉을 넘어 심곡리 앞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심곡리를 내려다보니 조용한 마을이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구천동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심곡리로 이동하던 중 나무를 지고 가던 나무꾼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앞마을에 사는 농부라고 밝히면서 묻지도 않았는데도 “이현상(李鉉相) 부대는 이미 이틀 전에 짐꾼들을 앞세우고 지리산(智異山)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마 이현상 부대는 이미 지리산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나무꾼의 말을 들은 대원들은 봉우리를 잘 지키라는 차일혁의 명령을 망각하고, 봉우리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 대원들은 너무나 힘들고 지쳐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남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이 동네 아낙네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조금 전 만난 나무꾼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이현상 부대가 잠복해 있을 거라고 긴장했던 제18전투경찰대대는 그 말을 듣자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엄청난 숫자의 빨치산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빨치산들은 마을을 에워싸고 공격해왔다. 순식간에 척후 소대 30명, 중화기 분대 8명, 무주경찰서 의용경찰 30명 등 68명이 전사했다. 김진구 중대장과 중대원 1백여 명은 빨치산의 포위망에 갇혔고,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 이병선 경감은 후미에서 지휘하다가 간신히 본진으로 탈출했다. 이병선 대대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면목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권총을 꺼내 자결하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차일혁이 재빨리 권총을 빼앗은 다음,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병선 대대장을 향해 “어떻게 되었나? 1중대장은 전사했는가?”라고 물었다. 이병선 대대장은 “속았습니다. 속았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차일혁은 먼저 퇴로로 이용할 수 있는 거칠봉 능선으로 연결되는 보안리 뒷산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유 연락병을 불러 “너는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가 1중대장에게 전해라. 20분 후에 적들의 포위망을 향해 집중 사격하여 퇴로를 만들어 놓을 것이니 그 틈을 이용하여 무조건 후퇴하라고 전해라!”라고 명령했다. 차일혁의 이 명령은 죽으러 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유 연락병은 비장한 얼굴로 적진을 향했다.
빨치산들은 차일혁 부대가 올라갈 지점의 입구를 막아 1중대의 후퇴를 봉쇄하고 있었다. 1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협곡을 따라 올라간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힘들어도 그들의 포위망을 결사대로 돌파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차일혁이 직접 로켓포를 들고 나섰다. 그러자 2중대원이 차일혁을 따라나섰다. 2중대장은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했지만, 차일혁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2중대원 30명과 중화기를 가지고 적진(敵陣)을 향해 달려갔다.
차일혁과 부대원의 진격모습은 빨치산에게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사방에서 날아온 적탄에 의해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거꾸러졌다. 차일혁은 여기가 내 죽을 곳이라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로켓포를 발사했다. 다행히 평소에 명중률이 낮던 로켓포가 모두 명중했다. 대원들은 목표 지점을 향해 소총과 중화기를 집중시켰다. 적의 포위망이 흐트러지자 1중대원들이 퇴로를 열고 본대로 합류해왔다. 중국에서 박격포 포수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차일혁은 부대의 지휘관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로켓포를 메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탈출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과 57사단 빨치산들이 한데 뒤섞여 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2중대원들이 거의 다 후퇴할 때까지 계곡 입구에서 사격을 계속하던 차일혁 부대는 추격하는 빨치산들의 엄청난 세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일혁도 “여기서 최후를 맞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하고 있을 차일혁이 아니었다. 추격해오는 빨치산들에게 60밀리 박격포와 50밀리 기관총을 쏘아댔다. 차일혁 부대의 필사적인 사격에 빨치산들은 더 이상 추격해 오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차일혁 부대는 거칠봉으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나 후퇴하면서 부상당한 대원 한 명을 끌고 오느라 차일혁의 옷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차일혁은 1중대장부터 찾았다. 차일혁에게 불러온 1중대장은 “대장님 모두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한 뒤 이병선 대대장과 마찬가지로 자결하려고 했다. 차일혁은 1중대장을 진정시키고 나서 피해 상황을 보고받았다. “1중대원 30명, 중화기 소대 10명, 무주경찰서 의경 50명 등 90여 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 이래 최초의 패배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1중대장이 지휘하던 약 2백 명의 병력 중 반수가 희생을 당했다. 빨치산에게 많은 피해를 입은 1중대는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빨치산들이 계속 추격해 온다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차일혁은 설천지서로 후퇴를 명령했다. 그때는 오후 5시를 지나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후퇴를 서둘러야 했다.
그때 협곡을 따라 후퇴를 하던 차일혁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빨치산들이 추격하지 않고 쉽게 물러난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그들이 계속 추격했더라면 1중대는 완전히 전멸했을 것이고, 협곡 입구에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지원사격을 하던 차일혁과 부하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빨치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차일혁이 보기에 1중대장과 대원들이 쉽게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빨치산들의 흉계인 것 같았다. 차일혁 부대를 전멸시키기 위해 빨치산들이 기만술책을 쓴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차일혁은 부하들에게 “협곡으로 연결되는 설천으로 가지 말고 산 위로 오르도록” 지시했다. 지칠 대로 지친 대원들은 평탄한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산 위로 올라가라는 차 대장의 명령에 불만스러워 했다. 5부 능선을 타고 행군을 한다는 것은 차일혁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칠봉을 지나 별안부락, 사선암골을 거쳐 아홉 시간을 쉬지 않고 행군하여 무풍지서에 도착했을 때 차일혁 일행은 완전히 녹초가 됐다.
무풍지서에서는 한밤중에 연락도 없이 차일혁 부대가 들이닥치자 빨치산으로 오인하고 지서원(支署員)들이 사격해와 몇 명의 대원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간신히 사격을 멈추게 하였지만 대나무로 된 울타리 문을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18전투경찰대대라고 해도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서원 하나가 합죽이라는 대원의 고향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지서원은 며칠 전 오락회에 참석했다가 합죽이를 기억한 모양이었다. 한 대원이 이북이라고 하자 지서원은 합죽이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고 했다. 합죽이 정종화 대원이 직접 나가 말을 건네자 그때서야 문이 열렸다. 지서 안에 들어가자 난로가에 지서주임이 앉아 있었다. 1중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지서주임을 냅다 발로 걷어차 버렸다. 지서주임은 맞다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아홉 시간이 넘게 걸린 후퇴였지만 무사히 무풍지서로 돌아오는 데에는 구천동에서 길안내를 자청하고 나선 소년의 공이 컸다. 차일혁은 그 소년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탄띠를 풀어줬다. 차일혁 부대는 무풍지서에서 하루를 보내고 설천국민학교로 돌아와 전열을 가다듬었다. 계속해서 3명, 4명, 10명씩 대원들이 무풍지서와 설천지서로 돌아왔다. 이한섭이 지휘한 특공중대는 몇 명의 부상자를 내긴 했으나, 전원이 무풍지서로 돌아왔다. 안성면에서 새재를 넘어 심곡리로 들어가던 차일혁 부대도 아무런 접전 없이 철수했다.
차일혁 부대가 전멸했다는 풍문에 무주경찰서와 도경으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차일혁은 도경국장의 전화를 받고 그동안의 상황을 간략히 보고하고, 실탄보급을 긴급 요청했다. 간부들과 대책을 토의한 차일혁은 전 대원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패전으로 지쳐 있는 대원들을 향해 비장한 연설을 했다.
“우리가 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전멸한 소대원들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우리는 건재하고 있다. 전투에서 항상 이긴다는 법은 없다. 우리도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받아들이자. 그러나 도경에서는 우리가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고, 내가 보기에도 여러분들은 예전의 사기를 상실해 버린 것 같다. 빨치산들은 자기 동료의 시신을 우리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동료의 시신을 가지고 후퇴하는데 우리는 숱한 전투에서 생사를 같이한 우리 전우의 시신을 내버려두고 우리만 살자고 이렇게 도망쳐 왔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빨치산들을 토벌해 원수를 갚기보다 먼저 나와 함께 전우들의 시신을 찾으러 갈 대원들은 앞으로 나서라.”
차일혁 다운 연설이었다. 전우의 시신을 찾으러 가자는 차일혁의 말에 분위기가 일순 숙연(肅然)해졌다. 대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차일혁이 먼저 제18전투경찰대대가를 선창했다. 대원들도 한 명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부를 때는 비통했었는데, 분위기가 점차 하나가 되어가면서 깊은 전우애를 느끼게 했다. 이로써 의기소침해 있던 차일혁 부대는 다시 활력을 되찾게 됐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차일혁은 대열을 정비했다. 구천동을 향해 진격하기 위해서다. 본부에 남아 있던 실탄을 모두 분배하고, 도경(道警)에는 “전우들의 시신을 찾고 적들을 분쇄하지 않고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는 짤막한 보고를 하고 출발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보신병(保身兵) 최순경이 차일혁 앞으로 나서며, “대장님의 보신병인 저는 죽음이 두려워 대장님보다 먼저 후퇴해 버렸습니다.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차일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혀 내색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차일혁이 최순경에게 “너만의 잘못이 아니다. 나 역시 전우들의 시신을 버려둔 채 후퇴한 것은 마찬가지다. 어떻게 내가 너를 처벌하겠느냐. 아무 소리 말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자, 최순경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이병선 대대장도 차일혁에게 “대장님은 왜 저를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하며 나섰다. 그러자 김진구 1중대장도 자기가 앞장서겠다며 우겼다.
차일혁 부대는 구천동 초등학교를 지나 쓰라린 패배를 겪었던 심곡리로 들어섰다. 화랑소대, 결사대, 돌격대가 척후부대로 앞장섰다. 후미에는 중화기 부대가 빨치산들이 있음직한 계곡 능선을 향해 박격포 사격을 했다. 1중대 1소대와 중화기 부대 그리고 무주경찰서 의경들이 처참히 당한 지점에 이르자, 차일혁은 비참한 광경에 눈을 감고 말았다. 단일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전우들이 희생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1소대원 21명, 중화기 대원 6명, 의경 26명 등 61구의 시신을 눈물로 거뒀다. 무주 구천동 전투는 차일혁이 이현상의 직속부대를 만나 싸운 첫 전투였으며, 빨치산 토벌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패배한 전투이기도 했다.
옹골연에서 같이 유격대 활동을 했던 김준철과 유 연락병이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차일혁이 그들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들의 시신을 대하면서 차일혁은 자신이 그들을 죽였다는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특히 유 연락병은 내장산 작전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항상 차일혁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던 충실하기 그지없는 부하였다. 1중대장은 자기 친동생의 시신을 안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정들었던 전우들의 시신을 대하면서 차일혁은 부하들을 죽인 것은 빨치산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빨치산들이 숨어 있을 만한 지점에 박격포 사격을 수차례 했지만 이미 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전우들의 시신을 운반하면서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던 대원들은 배방리, 삼공리, 심곡리 주민들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죽여 버려야 한다고 흥분해 소리쳤다. 며칠 전 작전을 개시할 때 이현상 부대가 이미 떠나버렸다는 나무꾼과 동네아낙네들의 말에 속아 큰 화(禍)를 당했던지라 마을 주민들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차일혁의 생각은 달랐다. 통비분자(通匪分子)라해서 주민들을 처벌한다면 결국 빨치산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것을 차일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차일혁도 인간인지라 죽은 부하들의 시신을 보자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 역시 그 마을들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차일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일단 심곡리에 들어가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에는 젊은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노인과 여자들뿐이었다. 의경 한명이 총 한방을 쏘면서, “어제 우리들을 속인 놈들 어디 갔어?”하며, 마을 촌로(村老)들을 위협했다. 대원들은 거의 흥분한 상태로 “젊은 남자들은 모두 어디 갔느냐?”며 주민들을 몰아세웠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모두들 통비분자라며 다그치자 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높은 양반! 우리들은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몰라요. 우리들에게 죄가 있다면 미련하고 멍청하여 조상대대로 내려온 이곳을 떠나지 못한 것이며 다른 죄는 없습니다. 8개월 전 군인들이 이곳에 진주하여 아녀자들을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토벌대를 보면 여자들 걱정을 해야 하고, 빨치산들을 보면 젊은이들이 짐꾼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곳을 떠나지 못해 이리저리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죄가 있다면 다 죽이고 가시오. 도대체 이 민족상잔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차일혁은 노인의 처연한 하소연을 듣자 쌓였던 분노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사리(事理)가 밝고 불심(佛心)이 깊었던 차일혁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차일혁이 나섰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얼마 전에 이곳 마을 사람들이 한 말을 믿고, 많은 대원들이 빨치산들에게 희생을 당해, 부하들이 흥분해서 거친 언사(言辭)를 한 점 용서하십시오. 절대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습니다.”라며 사과하고, 부하 대원들을 달래서 본부로 돌아왔다. 차일혁의 과감한 지휘조치로 배방리, 심곡리, 삼공리 주민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민족적 비극이 될 수 있었던 참사(慘事)를 차일혁이 막았다.
설천국민학교로 운반해 온 시체들을 확인해 본 결과 의경(義警) 24명과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 3명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빨치산들은 보통 경찰들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옷을 벗기고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57사단은 이현상의 직속의 부대로 기존의 빨치산들과는 행동 양태가 달랐다. 그후 행방불명됐던 무주경찰서 의경 24명이 4일 만에 안성지서로 돌아왔다. 빨치산은 의경과 정식경찰을 구분해 의경들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며 ‘정치학습(政治學習)’을 이틀 동안 시킨 후, 모두 방면했다는 것이다. 정식 경찰에 대해서는 ‘악질 반동’이라며 따로 감금시켰다고 했다. 포로가 되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의경들이 살아와서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으나, 대원 3명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차일혁의 마음은 무거웠다.
차일혁 부대의 본부가 있는 설천국민학교에서 구천동 전투로 산화한 전우들의 합동장례식이 거행됐다. 조총(弔銃)과 제문으로 영령들을 위로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가와 함께 장작의 불길이 타오르며 전우들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변해가자, 대원들은 모두 통곡을 했다. 차일혁도 부하들과 함께 통곡을 하면서 늘 간직하고 있던 염주를 굴리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29구의 영령들 앞에서 차일혁은 “자신의 부대에 커다란 패배를 안겨준 이현상 만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꼭 잡고야 말겠다.”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비록 적일 망정 의경 24명을 살려준 은혜는 은혜대로, 복수는 복수대로 되돌려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