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빌라이 후반기에 대도 완성
대도 건설에는 20년이라는 많은 기간이 소요됐다. 실제로는 쿠빌라이 말기에 가서야 비로소 도시가 거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거대한 도시의 건설은 사전에 세워진 면밀한 계획과 설계에 바탕을 두고 추진됐다. 하지만 지금의 대규모 공사처럼 기공과 준공기간을 정해 정확히 맞춰나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몇 단계에 걸쳐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밟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철저히 계획된 대도
대도는 그래도 철저히 계획된 도시였다. 대도의 전체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그 내부에 바둑판처럼 동서남북이 교차되는 간선도로들이 만들어 졌다. 간선도로에 의해 구획된 작은 사각형 안에 각 지점의 기능에 맞게 여러 가지 건물들이 들어섰다. 대도성을 바깥을 두르는 외성의 길이는 60리로 성스러운 간지(干支)가 한 바퀴 도는 숫자를 적용시켰다.
대도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여정문(麗正門)으로 그곳을 들어서면 황제가 사는 화려한 누각과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내성(內城)안에 있는 황제 오르도다. 내성은 바로 쿠빌라이가 눈여겨보아 두었던 경화도가 있던 호수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는 황제가 기거하는 황제 오르도, 왼쪽에 황태자궁이 들어선 황태자 오르도로 꾸며졌다. 호수의 이름도 태액지(太液池)로 바뀌었다.
▶ 세계 도시로서의 위용
황제 오르도 옆에는 황제가 기거하는 연춘각(延春閣)이 있고 그 뒤에 아름다운 정원인 어원(御苑)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 오르도에서 동서로는 홍문을 통해 외성으로 연결되는 직선의 도로가 만들어졌고 그 도로는 동쪽의 제화문(齊化門), 서쪽의 평칙문(平則門)을 통해 외부로 나가도록 돼 있었다.
외성의 성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3개씩 모두 12개가 세워졌다. 내성(大內)궁궐의 뒤편, 도성의 중심부에는 고루(鼓樓)와 종루(鍾樓)가 나란히 들어섰다.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티베트 불교와 힌두교 사원의 높은 첨탑이 조화를 이루면서 대도는 제국의 중심지, 나아가 세계의 도시로서 위용을 드러냈다.
▶ 몽골인이 세운 중화식 도성
대도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식 궁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까지 중국인조차 세우지 못했던 가장 이상적인 중화식(中華式) 도성을 이방인인 쿠빌라이가 세운 셈이었다. 통상 궁궐은 그 정권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여겨진다. 쿠빌라이의 대도 역시 몽골 제국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할 만큼 충분한 위용을 지니고 있었다.
▶ 바다로 향한 유목민의 꿈
더욱 놀랄만한 일은 궁궐이 아니라 대도가 지닌 기능이었다. 대도는 단순히 하나의 궁궐이 아니었다. 바다로 달려 나가겠다는 유목민들이 가진 꿈의 출발점이었다. 초원을 말달리던 유목민들이 이제는 수로와 바다를 헤집고 멀리 세계로 나가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여기에 담아 놓았다.
그 꿈의 출발점은 바로 대도성 북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 적수담(積水潭)이었다. 바로 종루와 고루의 왼쪽에 자리한 지점이다. 말이 호수지 그 것은 내륙 속에 자리한 항구였다. 이 적수담은 수로를 통해 통혜하(通惠河)로 이어지고 다시 백하를 따라 직고(直沽), 즉 지금의 천진(天津)에 이르면 드넓은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천주와 광주 등 남중국의 해상도시는 물론 고려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항로가 연결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지나해와 인도양을 거쳐 세계로 끝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대도는 애초부터 바다를 품는다는 놀라운 계획아래 건설됐다.
▶ 바다와 육지 연결 물류시스템
바다만 품는 것이 아니라 남북대운하를 통해 중국의 대륙까지 물을 통해 연결하겠다는 계획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는 애초부터 남송을 손에 넣는다는 전제아래 이 계획이 추진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인공호수 적수담이 들어서면서 그 주변에는 시장과 창고 그리고 경제관청 등이 자리를 잡았다. 주변 지역이 완전히 경제 중심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멀고 먼 바닷길을 헤치고 직고에 도착한 무역선에 실린 상품들은 운하를 지나는 배로 옮겨져 수로를 따라 적수담까지 운반돼 왔다. 뭍으로 옮겨진 상품들은 대부분 우마차를 이용해 제국 각지로 실려 나갔고 일부는 창고에 저장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 각지로 향하는 공도(公道)가 만들어졌고 내륙의 교통망인 역참제(驛站制)는 더욱 새롭게 정비되고 보완됐다. 정비된 내륙교통망을 통해 제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대도로 운송된 뒤 적수담에서 배에 실려져 반대의 물길을 따라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적수담을 오가는 배가 하루에 수백 척에 이르렀다고 하니 육지와 바다로 연결된 이 엄청난 물류 시스템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니까 대도는 애초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개발되었다는 얘기다.
▶ 열린 마음의 유산 대도건설
북경과 북경의 창구 노릇을 하는 외항 천진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어 낸 최초의 인물도 바로 쿠빌라이인 것이다. 초원에 터전을 두고 게르에서 살아온 유목민들이, 더욱이 바다가 없는 내륙에 살았던 그들이 이처럼 대규모의 도시를 만들고 세계와 연결하는 물류시스템을 만들겠다는 믿기 어려운 구상을 스스로 고안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유병총과 같은 중국인 학자들이 쿠빌라이의 막연한 꿈을 구체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쿠빌라이가 이 같은 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칭기스칸이 물려준 열린 마음의 유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다로 이어지는 적수담의 남쪽 끝은 태액지의 북쪽 끝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또 서쪽으로는 외성 화의문 위쪽으로 나 있는 수로를 통해 외부로 연결되게 만들었다. 이 화의문은 20년 전까지 원래의 자리에 서 있었던 유일한 성문이었으나 북경의 도시개발과 함께 아쉽게도 헐려 나가고 말았다.
▶ 궁궐보다 주로 야영지에서 보낸 쿠빌라이
이름 그대로 거대하게 만들어진 대도시 대도! 이 도시는 쿠빌라이가 자신이 살아가는 근거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었고 쿠빌라이 자신도 중화문명권에 상당히 젖어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 출신의 근본을 버리지는 못했다. 쿠빌라이는 이 큰 성의 중심부에 자리한 황제 오르도에서 지내는 시간 보다 바깥의 야영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유목민 출신인 그가 규격화된 성안에 갇혀 지낸다는 것은 아마도 취향에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쿠빌라이는 대 제국을 다스리고 세계로 연결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를 상징하고 통치하는 근거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초원에서의 삶과 대륙에서의 삶을 절충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대도의 건설은 세계로 향하는 쿠빌라이의 포부를 실천에 옮기는 첫 걸음에 불과했다. 대도 구상에 포함된 것들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