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보다는 탁월한 통치가
칭기스칸의 막내 툴루이의 둘째아들인 쿠빌라이!
그는 대몽골제국을 완성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칭기스칸이 제국의 바탕을 만들었다면 그 바탕위에 대원(大元)제국을 만들어 팍스 몽골리카(Pax-Mongolica)를 실현한 인물이다.
*팍스-몽골리카((몽골에 의한 평화) : (몽골 제국의 정복전쟁에 의해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이 정치적 단일체제로 편성되고 그 속에서 광범위하고 긴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진 현상)
역사는 그에게 할아버지와 같은 영웅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탁월한 국가 경영자이자 통치자, 노련한 정치 행정가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가문의 몰락으로 역사에 이름도 내밀지 못하고 사라졌을 지도 모를 쿠빌라이는 툴루이家의 부활과 함께 역사의 중심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얻는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항상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쿠빌라이에게 대몽골제국의 대칸 자리는 그냥 온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전적으로 쿠빌라이의 치밀한 준비성과 그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성품에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 동방에 대한 큰 관심
1214년, 칭기스칸은 중국 땅 금나라를 쳐서 무릎을 꿇렸다. 장차 그 땅을 경영할 쿠빌라이는 바로 그 때 태어났다. 어릴 때 쿠빌라이에 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사냥에서 짐승을 잡아 할아버지 칭기스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 정도가 거의 전부다. 다만 어릴 때부터 중국 대륙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문의 부활과 함께 뭉케가 대칸이 되면서 쿠빌라이에게 동방경영을 맡긴 것을 보면 그렇다.
▶ 금련천 초원에 잡은 터전
형 뭉케가 동방 경영의 책임을 맡기자 쿠빌라이는 그동안 눈여겨보아 두었던 돌룬 노르(일곱 개의 호수) 지역으로 들어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곳은 지금 중국 땅 내몽골에 있는 지역이다. 형 뭉케가 동방경영의 임무를 쿠빌라이에게 부여하고 동생 훌레구에게 서방을 맡긴 것도 쿠빌라이에게는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쿠빌라이가 금련천(金蓮川)초원으로 들어간 것은 1251년으로 형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바로 그 해였다.
그 때 쿠빌라이는 30대 후반의 나이였다. 일곱 개의 호수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 금련천 초원지대는 당시에도 풍부한 물을 가진 기름진 초원이었다. 금련천의 위치는 카라코룸과 중도(中都) 사이에 중간 허리 역할을 할 만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 지역에서 먼저 몽골제국의 동방경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부족집단을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주력했다.
▶ 권황제 무칼리의 동방경영지
그 지역은 원래 칭기스칸이 충복이었던 무칼리에게 주었던 땅이었다. 1216년, 칭기스칸은 호레즘 정벌에 나서기에 앞서 중국방면의 경영을 위해 그의 왼팔 역할을 했던 장수 무칼리에게 권황제라는 칭호를 주고 그 지역을 비롯한 동방지역의 경영을 맡겼다. 당시 무칼리에게는 다섯 개 부족집단으로 구성된, 24개의 천호와 거란족을 주축으로 구성된 20개 천호 등 모두 44개의 천호가 주어졌다.
큰아들 주치에게 겨우 4개의 천호를 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열 배가 넘는 대군을 준 것이다. 칭기스칸은 호레즘 정벌에 나서면서 그만큼 배후의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고 자신이 가장 믿는 무칼리에게 5만에 가까운 병사를 주면서 그 지역을 잘 지키라고 맡겨 놓았던 것이다.
▶ 금련천 현지인들로 세력 형성
쿠빌라이가 이 동방지역에 들어섰을 때 무칼리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 지역은 무칼리의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여기에서 무칼리 왕가의 세력들은 물론 동방제국의 여러 부족들을 휘하로 끌어들였다. 소수의 병력만 대동했던 쿠빌라이는 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던 세력을 끌어들여 별도의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이는 애초부터 이 동방경영지를 발판으로 삼아 초원과 대륙을 동시에 움켜잡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군벌과 같은 형태의 자신의 세력이 형성되자 쿠빌라이는 동방제압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 첫 동방정벌 대상지 운남과 대리(雲南 大理)
그 첫 번째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 운남과 대리였다. 운남과 대리 원정은 후에 쿠빌라이가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남송(南宋)과의 전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쿠빌라이는 첫 원정지로 멀고도 험한 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운남과 대리지역의 확보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장강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남송을 옆이나 뒤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 통로를 장악하게 되는 이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리왕국의 도읍지였던 대리(大理)는 지금도 같은 이름을 지닌 도시로 남아있다. 미얀마 국경에서 150Km 동쪽으로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니 중국의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 현재 운남성의 성도(城都)인 곤명(昆明)에서 보면 서쪽으로 450Km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 도시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통하는 창산(蒼山)이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산수가 뛰어난 곳이다. 그래서 현재 이곳을 방문한 외지인들은 이 도시를 ‘중국의 카트만두’ 또는 ‘동양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 첫 원정 성공리 마무리
중국 땅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 이르는 이 먼 원정길을 위해 쿠빌라이와 휘하의 우랑카타이 부대는 1253년 10월 금련천을 출발했다. 우랑카타이는 바로 명장 수베타이의 아들이다. 원정군이 과거 유비의 촉나라 근거지였던 사천지방을 거쳐 대리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월로 남정군은 곧바로 대리에 대한 공략을 단행했다.
당시 대리왕국은 8세기이후 타이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쿠빌라이군은 대리의 왕이 피신한 지금 곤명(昆明) 근처의 운남부의 선천을 함락시킴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첫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몽골의 행정관으로 귀화한 중국인 유시중(劉時中)에게 그 곳 관리를 맡겼다. 첫 원정에서 성공을 거둔 쿠빌라이는 그 지역을 우랑카타이에게 맡겨두고 다시 금련천 초원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1254년 말로서 운남 대리원정에는 일 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다.
▶ 중국식 개평부 도성 건설
쿠빌라이가 첫 원정지역서 금련천 초원으로 서둘러 돌아온 것은 이제는 자신의 앞날과 관련된 장기 구상을 짜나갈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구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금련천 근처에 개평부(開平府)라는 도성을 짓는 일이었다.
개평부의 설계는 나중에 대도를 설계하게 되는 중국인 출신 참모 유병충(劉秉忠)이 맡았다. 비록 몽골고원의 동남부 끝머리이기는 했지만 초원의 한 가운데 들어선 중국식 도성은 앞으로 쿠빌라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중국식 도성을 짓는 일 뿐 아니라 쿠빌라이는 정복지의 토착세력을 끌어들여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어 나갔다.
▶ 뭉케, 쿠빌라이 정착화 견제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 쿠빌라이의 이 같은 행동은 대칸에게 충성하며 초원의 전사로 살아 가야한다는 원칙에서 분명 벗어나는 것이었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 이러한 쿠빌라이의 행위를 형인 뭉케가 못마땅하게 본 것은 당연했다.
쿠빌라이에 대한 뭉케의 견제는 그래서 시작됐다. 뭉케가 쿠빌라이에게 주었던 영지에 대한 국고감사를 실시한 뒤 회계 상의 의혹이 있다며 한인 관료들을 대거 처벌한 것도 별도의 자기 세력을 바탕으로 중국 땅에 정착화 되어 가는 쿠빌라이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