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칼럼] 늘어만 가는 대선 공약(空約)의 비용과 ‘숙의 민주주의’

2017-10-25 20:00

[이병태칼럼]

늘어만 가는 대선 공약(空約)의 비용과 ‘숙의 민주주의’


탈도 많고 말도 많던 대통령의 탈(脫)원전 논란이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일단락됐다. 언론의 추정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1000억원대의 사회적 비용이 발생했다고 한다. 만약 이 논란으로 원전 수출이 지장을 받는다면, 그 비용은 훨씬 클 수도 있다. 그런데 정부는 '숙의민주주의'로 사회갈등을 해결한 성공사례라고 선전하기에 바쁘다.

정부의 어마어마한 예산 낭비를 정당화하려면 우선 이 사안에 대한 성격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즉,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결정하라고 헌법이 정의하고 있는 정상적인 기구와 절차를 무시하고 다른 대안을 편법적으로 강구해야 할 만큼 이 사안이 긴급하고도 중요한 사회갈등의 요인이었느냐를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일부 극단적인 환경론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난 대통령 선거는 탄핵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으로 인해 후보도, 공약도 급조된 선거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공약은 선거과정에서도 크게 주목 받은 공약이 아니었고, 많은 국민이 공약의 존재 여부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일본 후쿠시마의 사망자, 그러니까 쓰나미와 질병 및 노환 등에 따른 사망자를 마치 원전 사고의 사망자인양  그 수를 과장 발표하는 깜짝 이벤트 등을 통해 일방적인 탈원전 선언부터 했다. 그러니 사회적 이슈로 부상할 수밖에.

사회에는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 이견이 있다고 사회적 갈등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사회적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행정부에 위임된 의사결정 체제나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결정을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고, 사회구성원이 끊임없이 사회혼란을 시도해서 사안을 넘는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그런데 원전과 같은 국가의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에 대한 행정부나 국회의 결정을 우리 사회가 거부해 국가의 정상적인 운영이 방해 받을 만큼 이번 일이 대립적 사안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지난 수십년 동안 원전의 확대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와 같은 반핵운동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결국 이 사안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때문이고 그것을 집권 후에 이슈화한 것도 대통령 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사안이 '숙의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실험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대의민주주의가 바로 숙의민주주의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적 이슈들을 직접민주주의에 의존하면 인기 영합에 흐르기 쉽다. 또, 대중들은 복잡한 사안을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해 사안을 연구하고 학습하고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적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어 정상적인 모든 나라에서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행정부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의사결정하는 과정에서 이해집단에 의한 왜곡이나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는 보완 장치로 의회의 숙의 과정이 있고, 국민들은 막대한 세금을 내서 이러한 헌법 기관들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과정은 숙의민주주의를 실험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숙의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가릴 일은 이 사안이 직접민주주의, 즉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집단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판단이다. 집단지성 이론은 문제에 따라 대중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정확한 규칙이 정해진 일들은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대체하고 있고, 선험적인 법칙과 전문지식이 많이 필요한 영역은 전문가의 영역이며, 그렇지 않고 확률적 추측이 있는 문제들은 여러 사람의 판단의 평균이 개인의 판단보다 옳을 가능성이 큰 집단지성의 영역이라고 한다. 에너지 정책이나 원전의 이슈는 보통사람의 추측의 평균치로 결정할 수 있는 확률적 사안은 절대 아니다.

결국 이 사안은 우리의 에너지 경제성이나 원전의 수출 가능성 등 산업적 가치를 무시한 채 대선과정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법한 공약을 집권 후에 용기 있게 털어내지 못해 일어난 일이며, 그에 따라 공약 비용이 발생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례가 누적되고 있다는 것이다. 통신 기본료 폐지와 한·중·일 해외 로밍 통신비를 면제하겠다는 공약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기본료 개념도 논란이지만 국민이 이해하는 월 1만1000원의 기본료는 통신 매출의 30%가 넘는다. 그런데 영업이익률 5~8%의 산업에서 30%의 매출을 내려주겠다는 것은 정부가 사기업의 매출을 일방적으로 인하하겠다는 것으로, 공약의 합법성 여부를 떠나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국제 간 통신사끼리 서비스 요금을 나누어 갖는 해외 로밍 비용을 면제하겠다는 것은 일본과 중국의 통신사에 정부가 통신비를 대신 내주기 전에는 불가능한, 그야말로 묻지마 공약에 해당하는 허황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심성 공약은 ‘득표용이었다’는 고백과 철회 대신, 공약을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정부는 통신시장의 초법적 개입을 계속하며 새로운 규제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 시늉이 가계비 경감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도 그 관치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경제구조상 최저임금 1만원의 공약도 같은 성격이다.

국민들은 경험적으로 선거과정에 수많은 공약(空約)이 남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공약들이 표만 된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게 우리 정치의 현실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무리했던 공약은 국민적 이해를 구하고 철회하는 것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공약을 이행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동원한 ‘자의적’ 해석의 숙의민주주의라는 홍보전보다 책임 있는 국정의 모습이다.

(위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