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55] 사람에 대한 열린 마음은? ①

2017-09-24 10:10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적도 품에 들어오면 내편"
칭기스칸의 열린 마음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적도 품에 들어오면 몽골 병사가 될 수 있었고 몽골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가져온 것이 다국적군(多國籍軍)의 탄생이며 다민족공동체(多民族共同體)의 탄생이었다.
 

[사진 = 칭기스칸과 푸른군대]

몽골 역사연구소의 오치르 소장은 "칭기스칸은 정복전쟁의 과정에서 포로나 정벌한 나라의 국민을 군인으로 편입시켰고 그 나라의 경제력 등 모든 힘을 다른 나라를 정벌할 때 사용했기 때문에 푸른 군대는 전쟁을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10만 명 남짓으로 출발한 푸른 군대가 20만 명, 30만 명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면서 수십만 명의 적과 대적할 수 있었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다국적 다민족공동체인 대몽골제국을 민족적인 개념이 아니라 국가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방인의 완전한 편입 시도

[사진 = 부하라 등대 미네라트]

물론 칭기스칸은 전쟁 초기에는 포로나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그들을 전선의 최 일선에 배치해 군사의 수가 많은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적이 겁을 집어먹도록 했다. 또 그들을 방패막이로 앞세워 적의 공격을 둔화시키는 데 이용했다. 그 결과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공격 때는 수가 많은 호레즘 군이 오히려 겁을 먹고 성문 밖으로 도망갔고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전투가 손쉬운 승리로 끝나기도 했다.
 

[사진 = 몽골군의 군무]

그러나 칭기스칸은 포로나 적의 주민을 그러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푸른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제국의 힘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들을 몽골제국 안에 영원히 편입시켜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이방인 옳은 충고 귀 기울여

[사진 = 장춘진인 금상]

그러한 것을 일깨워 준 사람들도 주로 야율초재(耶律楚材)나 장춘진인(長春眞人)과 같은 이방인 출신들이었다. 원래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칭기스칸은 사람들의 충고에 대해 귀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진 = 야율초재 추정도]

서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그 지역 주민들의 처리문제와 관련해 칭기스칸 휘하의 한 장군은 “새로 백성이 된 사람들은 전투에 별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 곳에 말 목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칭기스칸은 그럴 듯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야율초재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그 곳의 땅과 백성들을 활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을 설명해주자 칭기스칸은 즉각 야율초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는 대신 토지에 세금을 매기고 상품에서 공물을 거둠으로써 50만 냥의 은과 비단 8만 필 그리고 곡식 40만석을 챙길 수 있었다.
 

[사진 = 칭기스칸 좌상]

칭기스칸은 야율초재와 같은 거란족 출신의 지혜로운 인물을 폼고 그들의 직언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대제국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야율초재는 칭기스칸 이후 두 명의 칸을 보좌하는 명재상으로서 대원제국 건설의 초석을 다졌다. 아버지의 열린 마음을 이어받은 오고타이칸도 야율초재의 직언을 받아들여 적지 않은 고민스런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금나라 마무리 정벌 때 임시수도 변경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 "종교를 품으면 민심도 얻는다."

[사진 = 초원의 집단 게르]

이 같은 포용정책으로 위그루인와 거란인, 한족, 퉁구트족은 물론 카자흐족 등 투르크 계통의 여러 세력들도 속속 몽골의 진영으로 편입됐다. 특히 각 나라의 종교지도자들을 품에 안게 될 경우 백성들의 민심도 함께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칭기스칸은 그들을 끌어들여 몽골제국의 일원으로서 우대해줌으로써 손쉽게 영역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민족과 인종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는 칭기스칸의 이러한 정책은 실제로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제국을 확장해갈 수 있었던 묘책이었다.
 

[사진 = 위구르 무희]

그래서 몽골제국 안에서는 점차 종족과 인종 사이에 거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져 갔다. 초기 전쟁 이후에 실제로 몽골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큰 전쟁을 자주 벌이지 않으면서 다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그래서 동쪽의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세계 최초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 후계자에게 이어진 종교 관용 정책

[사진 = 몽골 축제장 깃발]

이러한 흐름은 칭기스칸의 후계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후계자 시대에 건설된 4대 울루스 (킵차크한국, 차가타이한국, 일한국, 오고타이한국)도 같은 방법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마치 과거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 소련의 핵우산 안으로 찾아들어 안전을 취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민족들이 몽골이라는 보호막 속으로 찾아들어 평화를 보장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 열린 정책은 몽골제국 안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새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야율초재와 야율아해, 야율독화와 같은 거란인들, 자파르와 오코나, 앗산과 같은 이슬람인들, 장춘진인과 같은 한족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