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적도 품에 들어오면 내편"
칭기스칸의 열린 마음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적도 품에 들어오면 몽골 병사가 될 수 있었고 몽골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가져온 것이 다국적군(多國籍軍)의 탄생이며 다민족공동체(多民族共同體)의 탄생이었다.
[사진 = 칭기스칸과 푸른군대]
몽골 역사연구소의 오치르 소장은 "칭기스칸은 정복전쟁의 과정에서 포로나 정벌한 나라의 국민을 군인으로 편입시켰고 그 나라의 경제력 등 모든 힘을 다른 나라를 정벌할 때 사용했기 때문에 푸른 군대는 전쟁을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10만 명 남짓으로 출발한 푸른 군대가 20만 명, 30만 명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면서 수십만 명의 적과 대적할 수 있었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다국적 다민족공동체인 대몽골제국을 민족적인 개념이 아니라 국가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방인의 완전한 편입 시도
물론 칭기스칸은 전쟁 초기에는 포로나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그들을 전선의 최 일선에 배치해 군사의 수가 많은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적이 겁을 집어먹도록 했다. 또 그들을 방패막이로 앞세워 적의 공격을 둔화시키는 데 이용했다. 그 결과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공격 때는 수가 많은 호레즘 군이 오히려 겁을 먹고 성문 밖으로 도망갔고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던 전투가 손쉬운 승리로 끝나기도 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포로나 적의 주민을 그러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푸른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제국의 힘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들을 몽골제국 안에 영원히 편입시켜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이방인 옳은 충고 귀 기울여
그러한 것을 일깨워 준 사람들도 주로 야율초재(耶律楚材)나 장춘진인(長春眞人)과 같은 이방인 출신들이었다. 원래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칭기스칸은 사람들의 충고에 대해 귀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서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그 지역 주민들의 처리문제와 관련해 칭기스칸 휘하의 한 장군은 “새로 백성이 된 사람들은 전투에 별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 곳에 말 목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칭기스칸은 그럴 듯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야율초재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그 곳의 땅과 백성들을 활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을 설명해주자 칭기스칸은 즉각 야율초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는 대신 토지에 세금을 매기고 상품에서 공물을 거둠으로써 50만 냥의 은과 비단 8만 필 그리고 곡식 40만석을 챙길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야율초재와 같은 거란족 출신의 지혜로운 인물을 폼고 그들의 직언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대제국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야율초재는 칭기스칸 이후 두 명의 칸을 보좌하는 명재상으로서 대원제국 건설의 초석을 다졌다. 아버지의 열린 마음을 이어받은 오고타이칸도 야율초재의 직언을 받아들여 적지 않은 고민스런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금나라 마무리 정벌 때 임시수도 변경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 "종교를 품으면 민심도 얻는다."
이 같은 포용정책으로 위그루인와 거란인, 한족, 퉁구트족은 물론 카자흐족 등 투르크 계통의 여러 세력들도 속속 몽골의 진영으로 편입됐다. 특히 각 나라의 종교지도자들을 품에 안게 될 경우 백성들의 민심도 함께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칭기스칸은 그들을 끌어들여 몽골제국의 일원으로서 우대해줌으로써 손쉽게 영역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민족과 인종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는 칭기스칸의 이러한 정책은 실제로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제국을 확장해갈 수 있었던 묘책이었다.
그래서 몽골제국 안에서는 점차 종족과 인종 사이에 거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져 갔다. 초기 전쟁 이후에 실제로 몽골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큰 전쟁을 자주 벌이지 않으면서 다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그래서 동쪽의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세계 최초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 후계자에게 이어진 종교 관용 정책
이러한 흐름은 칭기스칸의 후계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후계자 시대에 건설된 4대 울루스 (킵차크한국, 차가타이한국, 일한국, 오고타이한국)도 같은 방법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마치 과거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 소련의 핵우산 안으로 찾아들어 안전을 취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민족들이 몽골이라는 보호막 속으로 찾아들어 평화를 보장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 열린 정책은 몽골제국 안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새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야율초재와 야율아해, 야율독화와 같은 거란인들, 자파르와 오코나, 앗산과 같은 이슬람인들, 장춘진인과 같은 한족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