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9-17 14:28
차일혁, 고창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하고 주민들을 위무(慰撫)하다
차일혁 부대의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은 ‘기적’이었다. 75명이 2500명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차일혁 부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수적 열세를 딛고,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칠보발전소 탈환 및 인근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한 차일혁 부대가 전주로 복귀한 날은 1951년 3월 3일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전주에 도착한 차일혁 부대원들은 환하게 켜져 있는 시내의 전등불을 보고 감격했다. 그들이 싸워 지켜냈던 칠보발전소에 보낸 전기로 시내를 밝혔기 때문이다.
칠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전북 도경에서는 제18전투경찰대대에 몇 가지 특전을 부여했다. 먼저 토벌대장인 차일혁에게는 경감으로는 이례적으로 군용(軍用) 지프차가 배정됐다. 처녀출전인 구이작전에서는 경호병인 보신병(保身兵)과 함께 사이드카를 타고 지휘를 했는데, 정식으로 지휘용 차량인 군용 지프차가 나온 것이다. 또 하나의 특전은 제18전투경찰대대를 취재할 종군기자로 나중에 차일혁의 지우(知友)가 될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 기자를 보냈다.
김만석 기자는 전북일보 오명순(吳明淳) 국장의 추천으로 제18전투경찰대대로 오게 됐다. 그는 1917년생으로 몸은 호리호리하고 가냘프게 보였으나, 눈매는 단아하면서도 날카로움을 갖추고 있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지성을 갖춘 사나이였다. 김만석 기자는 차일혁이 쓴 그동안의 전투기록에 대해 자세히 취재했다. 특별히 빨치산의 행동양식과 전투양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듯 했다.
차일혁은 이병선 경감을 부대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작전참모를 겸하게 했다. 그만큼 그는 믿을만 했고, 능력도 갖추고 있는 인재였다. 그때 육군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김용운이 전투경찰에 들어와 경위로 임관한 뒤 차일혁 부대로 배치됐다. 그의 고향은 전북 고창군 해리면이었다. 김용운은 군에서 장교로 근무는 했으나, 전투경험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과 군관계자들의 추천장으로 갖고 왔기 때문에 차일혁은 김용운을 3중대장으로 임명했다. 차일혁은 김용운을 3중대장에 임명하면서 이병선 부대대장 겸 작전참모의 통제를 받도록 조치했다. 그것은 김용운이 1중대장이나 2중대장과는 달리 실전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느 정도 훈련도 마치고 새로 간부들을 맞이한 차일혁 부대에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그때가 1951년 3월 10일이었다. 전북도청 앞 광장에서 최석용 전북지구전투사령관 겸 11사단 13연대장의 격려사를 들고,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는 30대의 트럭에 병력을 나눠 타고, 도내(道內)에서 치안이 가장 위험하기로 알려진 고창(高敞)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게 됐다. 전주에 온지 불과 1주일 만에 다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게 됐다.
차일혁은 고창에 도착하자, 부대대장과 함께 작전계획을 수립하면서 수색대를 빨치산들의 준동이 심한 지역에 투입했다. 빨치산에 정보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정보수집을 위해 수색대를 보냈다. 수색대는 북한군 점령시절 그들에게 협력했던 ‘치안대원’ 출신들로 이루어진 차일혁의 ‘특별부대’였다. 수색대는 빨치산들과 똑같이 따발총, ‘인민군’ 모자, 기마복 등으로 가장하고, 빨치산에 대한 정찰활동에 나섰다. 정찰을 나갔던 수색대원들이 몇 시간 후 빨치산 4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빨치산들과 같은 복장을 한 수색대원들을 보고 빨치산으로 오인하고 왔다가 붙잡힌 것이다. 차일혁의 뛰어난 지략(智略)이 다시 한 번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차일혁은 생포한 빨치산들을 심문하여 귀중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빨치산들은 주로 심원면과 해리면에 접해있는 연화봉 일대에 포진해 있는데, 그곳에는 전북도당 정치보위부장 겸 노동당중앙위원인 김명환(일명 김명곤)의 지휘를 받고 있는 왜가리부대·기포병단·번개병단이 있다는 것이었다. 왜가리부대는 목소리가 왜가리를 닮았다는 박춘생이 대장이고, 기포병단은 이철준이 대장이며, 번개군단은 일명 ‘백암 돌진대장’이라는 자가 대장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또 1·4 후퇴시 청년방위대 소속 수십 명의 대원이 빨치산에 합류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고창지역의 빨치산의 수는 어림잡아 5백 명인 것으로 추산됐다. 빨치산들이 포진하고 있는 연화봉은 변산반도와 경수산의 중간에 위치한 봉우리로 서해안에 근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이후 계속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던 심원면과 해리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은 서해안을 통해 북한과 연락을 취하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 험준한 산들이 있어 그들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지연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치산들은 이런 지리적,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차일혁이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고창지역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는 김명환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6·25전쟁 이전에 남로당(南勞黨) 전북위원장을 지냈고, 전쟁 이후에는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전북도당 정치보위부장 겸 고창지역 ‘빨치산 사령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전북도당위원장이던 방준표와 맞먹을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던 ‘빨치산의 거물’이었다. 특히 김명환은 당시 박헌영의 직계로 남한지역의 빨치산들을 지휘하고 있던 ‘노동당 남부지도부’ 정치부책(政治副責) 여운철로부터 “서해안 일대와 가마골 만은 절대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차일혁이 상대할 빨치산은 대략 파악이 됐다. 그런 상태에서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는 1951년 3월 11일, 고창군 부안면 반암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한 후,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이때도 차일혁은 이길 수 있는 작전을 수립하여 실행에 옮겼다. 박격포 7문과 기관포 2문을 애기봉 기슭에 설치하여 연화봉에서 부안면으로의 철수로인 장연강을 향하게 했다. 이때 고창경찰서 병력 150명을 장연강을 건너 부안면에 포진하게 했다.
차일혁 부대는 3월 13일 밤, 드디어 연화봉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화력을 앞세운 차일혁 부대의 막강한 공격에 빨치산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차일혁 부대는 부안면으로 통하는 길을 빼고, 삼면(三面)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적이 도망갈 퇴로 한곳만을 열어둔 채, 3면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빨치산들은 공격하지 않은 곳으로 도망할 것이 뻔했다. 차일혁은 그것을 노렸다. 차일혁이 예상했던 대로 빨치산들은 부안면 방면으로 도주하기 위해 공격하지 않은 곳으로 몰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장연강이 있었다. 빨치산들이 안전하게 도망가려면 반드시 장연강을 건너야 했다. 차일혁이 쳐 놓은 덫에 드디어 빨치산들이 걸려들었다. 장연강은 보통 때는 수위(水位)가 발목정도 밖에 안됐지만, 만조 때는 서해안의 바다물이 들어와 어른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깊어졌다. 차일혁이 공격할 때는 만조였다. 차일혁의 계산은 치밀했다. 그런 것을 다 고려해서 공격했던 것이다. 빨치산들은 물이 불어난 장연강을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차일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애기봉 기슭에 배치됐던 박격포와 기관총에서 연신 불을 뿜어댔다. 그러자 부안면에 포진했던 고창경찰서 병력도 합세해 사격을 가했다. 장연강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공격을 받은 빨치산들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다. 20분간의 치열한 포격 및 사격으로 빨치산들은 궤멸(潰滅)되다시피 했다. 장연강의 물이 빠진 후, 확인해 보니 사살 165명, 생포 50명, 총기 151정을 획득했다. 대전과(大戰果)였다.
차일혁 부대의 뛰어난 전투장면은 <라이프>지에 ‘후방의 전투’라는 기사와 함께 사진이 게재됐다. 이 전투에서 1중대 1소대 박석기 순경은 왼손에 관통상을 입으면서도 적의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는 투혼을 발휘하여 귀감이 되기도 했다. 차일혁의 뛰어난 계략(計略)에 의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대승(大勝)이었다. 이 전투는 차일혁이 전투지휘관으로서 진가(眞價)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전투였다.
차일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 바로 민심수습에 들어갔다. 심원면과 아산면에 접한 부안면은 빨치산들이 후퇴하면서 저수지를 파괴하여 면(面) 전체가 물에 잠기고, 60여 명이 죽는 대참사를 겪었다. 그런 관계로 지역은 황폐해지고, 민심은 흉흉했다. 차일혁은 그런 주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필요가 있었다. 전투보다는 중요한 것이 주민들에 대한 위무(慰撫)라고 생각했다. 차일혁은 빨치산들이 저수지에 처박아 놓았던 7백여 가마니의 벼를 건져내어 주민들에게 나눠 줬다. 저수지에 벼를 가마니 째로 던져놓은 것은 빨치산들이 자주 사용하던 저장 수법이었다.
고창 지역 주민들은 차일혁 부대에 무한한 신뢰와 함께 고마움을 표했다. 차일혁 부대가 고창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자, 지역 주민들은 때늦은 추수에 들어갔다. 고창지역은 공산치하에서 가을에 추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들판에 벼를 버려두고 있었다. 차일혁 부대가 빨치산을 토벌하게 되자, 비로소 주민들은 들판에 버려뒀던 벼들을 걷어 들이게 됐다. 봄이 되어서야 겨우 들판에 버려진 벼 수확을 하게 된 것이다. 주민들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벼 수확으로 주민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됐다.
차일혁은 주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마을 운동회를 개최하여 주민들과의 친선을 도모하기도 하고, 화합 차원에서 단순 부역자들을 모두 방면하는 조치도 취했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주민들을 위해 획기적인 일을 처리했다. 그것은 상부의 허가증을 빌미로 고창 지역으로 들어오는 잡상인(雜商人)들과 모리배(謀利輩)들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해리면은 전국에서 이름난 소금을 생산하는 고장이었다. 그 때문에 잡상인과 모리배들이 설치고 다녔다. 당시 소금은 금덩어리만큼 비쌌다.
잡상인과 모리배들은 군 특수기관과 반공단체를 사칭하며 부역(附逆)했던 주민들을 협박했다. 그들은 단순 부역자들을 찾아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협박하면서 소금을 강탈해갔다. 차일혁이 보기에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더 많았다. 그것을 보고 가만있을 차일혁이 아니었다. 차일혁은 모리배들이 강탈한 소금을 되찾아 주민들에게 되돌려준 뒤, 잡상인들과 모리배들을 모두 쫓아버렸다. 주민들은 차일혁의 그런 조치에 ‘앓던 이를 뽑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차일혁이 주민들을 위해 힘쓰는 것도 잠시였다. 차일혁 부대는 또 다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그때가 3월 30일이었다. 고창지역에 대한 마무리 토벌작전이었다. 그날 새벽을 기해 방장산에서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화천봉을 넘어 영암, 도솔암, 선우사 등을 지나 능선을 타고 계곡을 넘으며, 산악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오후 3시경 오른쪽에서 공격을 하던 1중대가 소요봉 중턱에서 약 50~60명의 빨치산을 발견했다. 차일혁은 화력을 집중시켜 빨치산을 해안까지 밀어붙였다. 당황한 빨치산들이 해안까지 도망가다 길을 잃고, 간석지에 올려놓은 어선 속에 숨어 있다가 생포됐다. 끝까지 도주하거나 극렬하게 반항하는 빨치산들은 사살했다. 날이 어두워진 저녁 9시경에야 차일혁은 추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31일 미명을 기해 다시 토벌작전에 나섰다. 차일혁 부대의 계속된 추격으로 빨치산들은 사분오열(四分五裂) 흩어졌다. 차일혁 부대의 승리였다.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차일혁 부대는 빨치산 ‘36중대 부대장’과 ‘용강로 군단장’을 사살하고, 부안면 면청위원장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사살된 용강로 군단장(일명 박달부대장)은 부안면의 저수지를 파괴하여 부근 일대를 물에 잠기게 하여 많은 주민들을 희생시킨 자였다. 그는 차일혁 부대의 추격전으로 부하들을 거의 잃고, 겨우 2명의 부하를 데리고 고향인 부안면 오산리에 숨어 있다가 향방대원(鄕防隊員)에게 발견되어 사살됐다. 이 전투에서 차일혁 부대는 생포 152명, 각종 실탄 4,000발, 북한군 군복 150벌, 소련제 전화기 1대, 불온문서 다수를 획득했다.
작전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 김의택 도경국장과 미 고문관 스프링스 소령, 박기병 11사단 부사단장이 차일혁 부대를 방문했다. 김의택 국장은 차일혁을 껴안고 성공적인 작전에 만족을 표시하며, “이제 고창 주민들이 공비(共匪)들의 마수에서 벗어나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구려. 밤에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구먼. 우리가 이렇게 밤늦게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차 대장 덕분이지. 정말 수고 많았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차일혁 부대는 부안면 반암초등학교에 대대지휘소를, 그리고 심원초등학교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하고, 선무공작과 잔비(殘匪)소탕에 주력하고 있었다. 차일혁 부대의 그 동안의 활약으로 오랫동안 빨치산들에게 시달려왔던 고창의 심원면과 해리면의 민심이 차츰 수습되어갔다. 이곳에서 주민들을 괴롭히며 소금을 강탈해가던 잡상인과 모리배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고창지역은 차일혁 부대의 성공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안정을 되찾으면서, 주민들은 비로소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창읍에 주둔하고 있던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최석용 대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와서 사령관실로 갔다. 최 사령관은 차일혁에게 “차 대장, 경찰생활은 체질에 맞소. 나는 곧 국회의 인준을 거쳐 장성으로 진급하여 전방으로 갈 예정이오. 현역으로 복귀하여 나와 함께 전방으로 갈 생각은 없소. 그동안 차 대장이 거둔 전과를 고려하여 그에 상당한 예우를 해드리겠소.”라며 군 복귀를 권유했다.
차일혁은 최 사령관과 지방유지들의 추천으로 경찰에 투신했던 터라, 최석용 사령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후 차일혁은 “사령관님은 군인생활이 체질에 맞아서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최 사령관은 차일혁의 그 말에 “차 대장과 같은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말을 꺼낸 것이오.”라고 말하자, 차일혁은 “사령관님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이제 와서 나 혼자 떠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혼자서 떠나 버린다면 부하대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대원들은 모두가 공비토벌이 끝날 때까지는 전투경찰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라며 경찰을 떠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밝혔다. 군대로 다시 복귀하면 출세가 보장될 수도 있었다. 최 사령관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과거 동지였던 차일혁에게 군 복귀를 권유했던 것이다.
최 사령관이 차일혁에게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차일혁과 최석용은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독립군 동지였다. 최 사령관은 차일혁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 사령관은 차일혁을 아끼는 마음에서 군 복귀를 다시 한 번 권했던 것이다. 이후 최석용은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차일혁 곁을 떠났다. 최석용은 군에서 5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1959년 광복군 출신의 김동수, 박시창, 오광선, 박기성 등이 군을 떠날 때 함께 제대를 했다.
여하튼 차일혁 부대는 어려운 작전환경 속에서 약 20일간에 걸쳐 고창지역의 빨치산을 완전히 소탕한 후 그 지역의 치안을 회복시켰다. 이 작전을 끝으로 남한지역의 군 후방작전을 책임 맡았던 11사단이 전선으로 떠나게 됐고, 대신 최영희 준장이 지휘하는 8사단이 후방지역에 대한 작전을 책임지역지게 됐다. 이후 차일혁 부대도 고창지역 작전을 마치고 전주로 돌아오게 됐다. 차일혁 부대는 고창작전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사살 316명, 생포 202명, 총기 182정, 실탄 4,000발, 북한군 군복 150벌, 전화기 1대를 획득하고, 벼 700가마를 회수하여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이제까지 단일 전투에서 전투경찰이 얻은 전과로는 단연 최고였다. 차일혁 부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한 11사단장 최덕신(崔德新) 장군은 무공표창(武功表彰)을 수여하며 치하했다. 〈끝〉